22-10-27
어제 아래층 할머니가 이른 아침부터 부스럭거리는 게 꽤 불편했다. 이 방 구조는 커튼을 걷히면 해가 내 얼굴로만 내리쬔다. 아주 불공평한 구조다. 하지만 오늘은 그 덕에 일어나 준비할 수 있었다. 어제는 싫었던 것이 오늘은 고마운 일이 된다. 오늘의 기상시간 5:40분. 해가 떠오를 준비를 하는 시간이다.
MIND THE GAP. 갭차이에 유의하라. 이 에세이는 5개월 간의 내 호주 워킹홀리데이 여정의 기록이다. 읽으실 분들에게 미리 알려줄 것이 있다. 앞으로 별 이상스러운 이야기가 나올 거다. 이리로 샜다 저리로 샜다가 하는 현란하고도 한결같은 나를 담아낼 예정이다. 그러니 마음에 준비를 하길 바란다. 필체는 진지하지만 아주 산만한 모습을 만나게 될 테니까.
오늘 아침 이렇게 부산스럽게 발길을 옮기는 목적지는 바로 학원이다. 포크리프트(지게차) 학원에 면허를 따러 간다. 학원은 어딘가 공장지대에 위치해 있는 듯하다. 열차를 타고, 버스로 갈아탔다. 가는 길은 역시나 주택가가 한창이다. 버스 안에서 주택마다 잘 가꿔진 정원들의 꽃을 구경하는 재미가 있다.
수업시작이 얼마 안 남았는데 정신을 팔고 있다가 내릴 정거장을 한참 지나쳤다. 호주의 버스에는 정류장 안내가 없다. 내가 지도를 보고 있다가 정류장에 맞춰 벨을 잘 눌러야 한다. 정원들을 보다 지도를 놓쳤다. 이것 참, 진짜 더운 땀이 난다.
다행히 뛰다 보니 수업시간 안에 들어갈 수 있을 것 같다. 숨을 고르려고 멈춰 서서 사진을 찍을 여유도 있었다. 오늘의 하늘이 어제처럼 또 청명하다.
포크리프트 수업은 꽤 당황스러웠다. 이틀 수업을 듣고 시험을 봐야 하는데 이걸 소화할 수 있을지가 의문이다. 우선 자격증을 받기 위해 내 신원이 증명되어야 하기 때문에 신원 증명서류를 준비하는 게 오늘의 과제다. 자격증을 딸 수 있을지 없을지 걱정은 뒤로 미뤄두기로 한다.
역에서 내려보니 스퀴즈 샵(Squeeze shop)이 보인다. 생과일도 전시되어 있는 걸 보니 그 자리에서 과일을 착즙 해주는 듯했다. 그런데 가격이 1달러 밖에 안 한다고? 1달러가 적혀 있기에 이걸로 달라고 했더니 받은 귤이다. 착즙은 가격이 더 비쌌다. 어이는 없지만 내가 주문한 건 귤이다. 어쩌다 보니 한 개에 1달러짜리 귤을 다 사 먹었다.
오늘은 수업이 좀 일찍 끝난 덕에 돌아와서 SERVICE NSW에 들렀다. 우리나라로 치면 주민센터 같은 곳이다. 엊그제 한국 대사관에서 받아온 공증으로 호주 면허증을 발급받으려 한다. 호주의 시스템이 한국에 비하면 느리고 불편하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었다. 하지만 직접 겪어본 이곳은 전산화가 잘되어 있고 시스템이 조금 더 간결한 느낌이다. 들어갔더니 직원 한 분이 필요서류에 대한 안내도 잘해주셨다. 우리나라로 치면 주민등록증 같은 ID카드도 발급했는데 사진은 따로 사진관에 갈 필요 없이 즉석에서 찍었다. 머그샷 같은 느낌도 들었지만, 그래도 수월하고 편하다.
이제 호주에 진짜 적법한 신분증을 갖게 될 거라 생각하니 기분이 묘하다. 조금 더 공식적인 이곳 사람이 되어가는 중이랄까?
형광조끼를 사러 가는 길이다. 학원에서 PPE(개인보호장비) 복장을 갖추고 오라고 했다. 안내 메일에 적혀 있었던 거란다. 호주에서는 위험 개소 작업자는 이 복장을 꼭 갖춰야만 한단다. 어제도 생각했지만 이곳은 진짜 법을 잘 지키는 곳 같다. 오늘 수업 내용도 온통 법과 안전에 대한 강조가 가득했다.
이 도심에 박쥐가 날아다닌다. 호주, 도대체 뭐 하는 곳이지? 이곳을 알다가도 모르겠다. 온갖 고층 빌딩이 자리 잡은 곳에 박쥐의 등장이라니. 불현듯 이런 예측 불허함이 나와 닮은 도시 같다는 생각이 스친다.
손톱모양의 예쁜 달이 오늘의 산책 친구다. 숙소에 돌아와서는 한국 친구들과 저녁을 먹고, 같은 방 독일인 아주머니와 여행 이야기도 나눴고, 브런치 글도 하나 작성했다. 남은 건 내일 있을 포크리프트 임시 테스트 공부다. 오늘 이것저것 하다보니 공부할 시간이 모자라다.
우선은 졸면서 공부를 한다. 잘 모르겠다. 포크리프트 학원에서 시드니 인력회사와 연결시켜 준다는 말을 오늘 들었다. 그렇다면 도시 이동을 미룰까? 호주에서는 경력이 중요하다고 들었다. 우선 여기서 경력을 쌓고 이동해도 늦지 않을 것 같은데? 될 대로 돼라. 대충, 뭐, 되지 않을까? 대책은 없지만 그냥 막연하게 나의 내일을 믿으며 하루를 마무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