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11-13
시티에서 벗어난 지 얼마나 되었다고, 주디와 다른 집으로 가면서 헤어진 지 얼마나 되었다고, 주디를 시티에서 만났다. 어제는 하루종일 공부하며 집에서 놀았고, 주디와는 이틀만이다.
주디가 꽤 늦게 일어난 바람에 나는 남는 시간에 마트에 가서 초콜릿을 샀다. 룸메 언니가 호주 초콜릿이 유명하단다. 우리에게 익숙한 몰티져스도 호주 초콜릿이다. 이 초콜릿은 분명 산타 모양 이랬는데... 산타 할아버지 어디 계세요...?
만나서 바로 브런치를 먹으러 갔다. 호주에는 브런치 식당이 많다. 그중에도 멋있고, 트렌디한 식당이 많다는 써리힐즈에 들렀다. 그리고 역시나, 10시 조금 넘어 도착했더니 온 식당이 만석이다. 호주는 정말 아침이 분주하다.
알아보고 온 식당에서는 1시간은 기다려야 한다. 길을 걷다 아무 식당이나 골라 들어왔다. 보다시피 테이블이 10개 남짓한 작은 규모의 식당이다
그런데 주문을 받으려고 보니 한국인 직원이 있다. 그래서 뜻하지 않게 한국말로 주문을 하게 됐다. 주위를 둘러보니 우리 포함 한국인들만 있는 테이블이 세 군데나 된다. 직원분이 말씀하시길 원래 이렇게 많지 않은데 오늘 특히 한국사람들이 많아서 본인도 놀랐다고 한다. 가끔 이럴 때면 이곳이 호주인지 한국인지 헷갈리게 되지만, 음식 맛은 역시나 한국의 맛은 아니다. 오묘하게 어딘가 부족하다. 영혼을 채우는 한 방이 없다랄까.
밥 먹고 소화도 시킬 겸 Australian Museum 박물관에 들렀다. 박물관 기념품 샵에는 이런 귀여운 것들이 많으니 구경 안 하면 손해다.
그냥 가볍게 구경을 온 건데, 처음부터 마음이 무거워졌다. "오, 아버지, 아버지, 저를 이곳에 묻어주세요. 이곳은 가장 깊은 곳이에요, 약속해 주세요." 이런 문구를 보고 지나칠 수 없었다. 영어를 공부하는 기분으로 쭉 읽어가다 마지막 부분에서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왜 이곳에 묻어달라고 하는지 묻자 이 소녀 트루가니니는 "내가 죽으면 태즈메이니아 박물관에서 내 몸을 원할 거란 걸 알기 때문이에요"라고 흐느껴 말했다고 한다. 옛 시절에 원주민은 백인들에게 그저 신기한 전시품에 불과했지만, 원주민들의 살아있는 영혼은 깊은 바닷속에 잠기는 한이 있더라도 화이트들의 손아귀에 놀아나고 싶지 않았던 걸 테다.
백인 가족에 의한 아이들의 입양; 그리고 아이들을 백인 가족으로 육성. 마지막 두 가지 전략은 특히 '흰 피부' 원주민의 아이들에게 적용되었습니다. 이러한 강제적인 분리는 아이들을 그들의 문화로부터 격리시키고 그들을 '백인'처럼 행동하고 생각하도록 키우려는 목적으로, 다소 의도적인 동화 정책의 일부였습니다.
이렇게 원주민 아이들을 부모와 격리시켜 백인처럼 행동하고 생각하게 교육하는 것이 그 옛날의 화이트들의 대단한 선민의식이었다. 뒤늦게 원주민들의 문화를 보호하고 그들을 존중하는 모습을 보여주고는 있지만, 둘러본 박물관의 풍경은 여전히 화이트다. 가슴 아픈 역사를 보러 온 앱오리지널(aboriginal, 호주 원주민들을 칭함)들은 없다. 과거의 이야기가 흥미로운 화이트들 대다수가 박물관을 채운다.
이곳은 박물관 상층에 하버뷰라고 쓰인 식당이었는데 하버뷰보다는 성당뷰다. 옆쪽으로 보타닉 가든의 멋진 풍경이 보인다.
주디와 함께 QVB, 퀸빅토리아 빌딩에 들렀다. 원래부터 시장의 용도로 지어진 건물인데, 빅토리아 여왕을 칭송하기 위해 지어진 고풍스러운 건물인 만큼 현재는 명품 상점들이 다수 입점해 있다.
아직 11월 중순인데 벌써 트리가 있다. 백화점에서도 트리용품을 판매하더니 이곳의 크리스마스 준비는 꽤 이르다.
우리는 마지막 종착지로 킬리빌리에 들렀다. 이곳 또한 시드니의 유명한 자카란다 풍경 명소다.
Milsons Park의 바로 옆에 있는 이곳에는 주말을 즐기러 나온 사람들이 가득하다. 보랏빛 봄과 함께 평화로운 오후의 기운이 우리를 에워싼다. 호주 답게 역시나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도 묵직한 공기가 사람들의 소리를 낮춘다. 그러면 우리는 공원 앞의 작은 부둣가에서 물멍을 때리기도 하고 벤치에 앉아 고요한 공원의 분위기를 누려본다.
마치 다시는 안 올 것처럼 시티 구석구석을 바삐 쏘다녔다. 덕분에 하루가 새로운 자극과 생각으로 가득 찼다. 그러면서도 한적한 봄 또한 두 팔 벌려 맞이했다. 내가 남반구를 이 계절에 다시 들러볼 날이 인생에 또 있을까? 없을지도 모른다. 인생이 쳇바퀴 안으로 다시 들어간다면 힘에 겨울 것이다. 그렇다면 이번 해의 자카란다가 내 인생의 마지막 자카란다 일지도 모른다. 더 만나지 못한 자카란다가 아쉽지 않게, 나는 열심히 봄을 탐색하고 있다. 하지만, 흘러가는 봄이 벌써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