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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배 Zoe Aug 20. 2023

나는 학사만 3개인 사람입니다

22-12-02


나는 출근을 할 때 세상의 소리를 들으며 걷는 편이다. 소피가 노래를 부르면 목소리를 젊게 유지할 수 있대서 가끔은 노래도 부른다. 혼자 노래를 부르며 출근해도 괜찮을 만큼 마주치는 사람이 적다.


가끔은 노래를 듣는다. 노래를 들으며 걷는데 왜 이렇게 행복한지 모르겠다. 인생이 자꾸 드라마 같고 영화 같다는 생각을 한다. 아마도 내가 거쳐온 거친 시간들 뒤에, 결국엔 찾아낸 평온함 때문이겠지. 이럴 때면 너무나도 행복해서 눈물이 찔끔 난다. 출근길에 실실 웃고 행복해서 눈물까지 흘리는 거 보면 진짜 미친 사람처럼 보일 것이 분명하다. 마주치는 사람이 없어 다행이다.






오늘은 창고 물건들이 입고되는 날이다. 인원이 필요했는지 피터가 거기로 갔다. 패킹을 나 혼자 하란다. 물건을 집어오는 피킹맨들은 3명인데 패킹을 나 혼자...? 토미가 곧 올 거니까 잘하고 있으라며 독려를 하고 간다.


덕분에 정신을 쏙 빼놓고 포장을 했다. 여기서 조금 이상한 점은 나는 그 포장이 너무 즐거웠다. 아무런 제약도 형식도 없는 이곳은 물건들의 부피를 보고 적당한 상자를 찾아내야 한다. 골라온 상자 안에 마치 테트리스하듯이 물건을 이리저리 끼워 넣고 나면 이렇게 보람차고 뿌듯할 수가 없다. '역시 내가 생각한 부피가 맞았군!'



작업장에는 보통 라디오가 틀어져 있는데 오늘은 아침 일찍부터 피터가 바빴던 바람에 조용했다. 시드니 라디오에서는 매일 Anti-Hero와 Forget me라는 노래가 하루에 3번씩 나온다. 사무실 직원인 팀이 와서 왜 노래가 안 나오냐고 당장 노래를 틀고 즐겁게 일을 하란다. 덕분에 오늘의 DJ는 내가 됐다. 잔잔한 재즈도 들었다가, 캐럴도 들었다가, 드라이브에 어울릴만한 곡까지 끝내주는 디제잉을 했다.



오늘은 나빈이라는 캐주얼 워커가 집 앞까지 데려다줬다. 나빈네 집을 가려면 조금 돌아가야 하는데도 집까지 데려다준다고 해서 냉큼 오케이 했다. 나빈은 네팔에서 왔다. 그리고 내가 있는 작업장엔 워홀 비자인 사람이 나 말고 없는데 그래서인지 만나면 보통 인사가 "Are you studying?"이다. 외지인은 학생비자로 호주에 체류하는 경우가 대다수다. 워홀비자는 길어도 3년이고 나이 제한이 있지만, 학생비자는 학업을 이유로 언제까지고 지낼 수 있기 때문이다.


"Are you studying"이라는 질문을 받으면 나는 학생비자인지 묻는 걸 알면서도 내 TMI를 털어놓는다. "복잡한데, 나는 한국 학사과정을 사이버로 수강 중이야."


나빈과 대화를 하다가 이게 내 3번째 학사라는 걸 얘기하니 질겁을 한다. 아직은 과정 중이지만 곧 학사 학위만 3개가 된다. 지금 생각해 보니 유별난 일이기도 하다. 한 분야의 전문가가 될 생각은 안 하고 이리저리 가볍게 알아가고 싶어서 이러는 건 아닐지 모르겠다.



집에 오자마자 부랴부랴 강의를 두 개 들었다. 신기하게도 요즘엔 내가 최근에 생각한 내용을 강의에서 뒤늦게 만나게 된다. 이 부분에서 교수님은 도미노처럼 세상에 퍼지는 변화에 대해 얘기하셨다. 다정을 도미노처럼 세상에 전파하고 싶은 내 생각과 비슷하다.



그리고 저녁 약속에 갔다. 포크리프트 학원에서 만난 샌디언니와 이삭을 만나기 위해서다. 이렇게 먹고 나는 60불을 지불했다. 술을 더 마신 둘은 돈을 더 냈다. 살 떨리는 가격이 아닐 수 없다. 이번 경험을 계기로 아마 이 시간에 바깥에 나와서 이렇게 음식을 먹는 일은 없을 것 같다. 돈이 너무 아깝다.


요즘 나는 사람들을 만나면 그 사람들의 바꿀 점을 찾는다. 심리학 강의가 나를 이렇게 만들었다. 둘은 딱히 바꿀 게 없다. 그래서 어쩐지 실망스럽다. 하지만 이 사람들의 인생 얘기를 얻어가는 시간이니 오늘 이 시간이 그리 손해는 아니다. 원래 한 두 달 후에 아몬드 농장에 갈까 알아보고 있었는데 샌디언니가 마침 그곳에 다녀왔다고 해서 목적지를 바꾸게 됐다. 이것도 큰 성과다.


포크리프트 학원에서 만난 샌디언니가 소피의 셰어하우스를 알려줬다. 사람의 인연은 어디서 급작스레 찾아올지, 그 사람들이 또 나에게 어떤 도움의 손길을 건네줄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인생 또한 마찬가지다. 항해와 물류를 배우던 내가 심리를 배우게 됐다. 이 모든 것에 연관된 부분이 있다. 내가 창고에서 일을 하는 것도 언젠가 내 삶에 어떤 영향을 줄지 모른다. 내 모든 과거의 어떤 지점이 나의 지금에게 도움의 손길을 건네는 것만 같다. 과거에 그리도 힘들었던 건 지금 이 순간을 충분히 느낄 수 있기 위함이었다. 나는 아침마다 그걸 온몸으로 느끼며 걷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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