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12-11
어째 주말마다 주디를 만나는 기분이다. 어제 주디와 전시회에 가자고 약속을 잡았다. 가려는 미술관은 오페라 하우스의 건너편에 있다. 써큘러키역에 정차하지 않는 트레인인 걸 몰라서 하버브리지를 넘고 말았다. 덕분에 주말 킬리빌리 마켓을 구경했다.
다행히 주디보다 일찍 출발했다. 찍어야 할 사진이 있어 내가 먼저 출발한 덕이다. 이곳은 지지난주 자카란다를 구경한 공원의 옆쪽 바다다. 아침 햇살에 반짝이는 푸른 바다와, 자그마한 요트들, 갈색과 주황색을 섞은 지붕 아래 있는 작은 빌라들과 주택들이 내 가슴을 콩닥거리게 한다. 벌써부터 오늘 하루가 근사하다.
점심을 이곳에서 먹고 넘어가자 하며 주디를 불렀다. 공원 가는 길에 본 일본식 식당이다. 가지산도와 마제소바를 먹었다. 멋있는 식사였다. 주말이라 그런지 서비스차지가 10%가량 더 붙어 60불이 넘게 나온 건 멋있지 않았지만.
오늘의 목적이다. 서도호 작가님의 전시다. 한국인이시지만 한국에서는 전시회를 잘 열지 않는단다. 시드니에 사는 덕에 얻은 귀한 기회다. 어쩐지 지난주에 이 미술관의 카페에 갔을 때 카페 메뉴에 한국식 요리들이 있는 게 이상했었다. 이유가 바로 한국 작가님 덕이란 걸 알게 되니, 국위선양은 이런 식으로도 가능하구나 싶어 진다.
오늘 전시의 주는 설치 미술인데 이런 미디어를 볼 수 있었다. 생각지도 못한 예술 방식이라 초반부터 충격을 받았다. 마치 비석을 탁본하는 것처럼 건물이나 장소를 흑연으로 문질러 종이에 입힌다. 사진 속 작가님이 작업 중인 공간은 5.18 민주화항쟁과 관련되어 있지만 버려진 건물들이다. 문지르는 걸 영어로 Rubbing이라고 하는데 이 프로젝트의 이름은 Rubbing / Loving이다. 잊혀가는 역사적인 공간들과 연결되고 싶었다는 작가님의 의도가 인상적이다.
이곳은 서도호 작가님 아버지의 집이었는데 이걸 몇 날 며칠 문질러 작업하는 영상도 볼 수 있었다. 이런 식으로 건물을 옮겨 올 수 있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사랑하는 공간을 간직하기 위해 예술가는 별난 일을 다 하는구나. 나는 사랑하는 걸 남기기 위해 글을 쓰는 것만을 생각했었다. 여기에 이런 새로운 방식이 있었다.
메인 포스터에 등장하는 작품이다. 계단을 타고 올라가는 것 같으면서도 아닌 것 같은 이 작품은 주위를 걸으며 감상하라는 추천 문구가 적혀 있었다. 가까이서 보기도 하고 멀리서 보기도 하면서 이런 작품을 만들기 위해 얼마나 많은 고뇌를 거쳤을까 하는 생각도 품어본다.
심상치 않은 작품을 만났다. 이 조그만 점들이 유리판을 받치고 있다. 우리는 그 유리판을 건너 다음 장소로 이동해야만 한다. 이 유리판 아래에는 재미있는 생각이 숨어 있다.
사람들이 걷는 유리판 아래에는 이렇게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그것도 꽤나 힘겨운 모습으로 사람들이 걷는 길을 받치고 있는 형상이다. 이런 작품을 통해 작가님이 전달하고 싶었던 건 무엇이었을까? 나는 내가 아무렇지도 않게 겪는 모든 일상을 떠받들고 있는 타인의 노력들을 순간 느꼈다. 별생각 없이 내가 누리고 있던 것에 이런 처절한 희생이 숨겨져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말이다.
공간을 통과하고 작품의 의도를 읽다 보니 우리가 건너온 유리바닥 옆으로 컬러풀한 벽지가 있다고 한다. 내 눈에는 전혀 화려한 색지가 아니었다.
이런 색의 어둡고 밋밋한 색지가 어떻게 컬러풀할 수가 있단 말이지? 이상하다, 생각하며 가까이 다가서본다.
벽지에는 이런 내용이 있었다. 서도호 작가님의 졸업사진첩 친구들의 얼굴이다. 이것 또한 전혀 생각해보지 못한 방식의 예술이라 얼얼해졌다. 누가 뒤통수를 한 대 때린 것만 같았다. 작가님의 생각에 당했다. 입이 닫힐 생각을 하지 않는다.
오늘 전시의 진짜라는 생각이 들었던 곳이다. 서도호 작가님이 지금까지 살아온 공간, 생의 공간을 이렇게 연결해 두었다. 작품으로서 서울, 뉴욕, 유럽, 런던의 집들을 이었다. 목적지가 아닌 목적지로 이끌었던 공간들을 그리고 싶었다고 한다. 예술을 구상하던 작가님의 공간이 또 다른 예술의 목적지가 된 이곳은 그야말로 여러 의미를 품고 있다. 가까이서 둘러보면 소화전이라던지 경첩의 디테일을 보는 재미 또한 쏠쏠하다.
이 밖에도 작가님의 습작들이나 작은 조형 작품들도 있었지만 크게 내가 감명을 받은 작품들은 이랬다. 나는 원래 전시에 갈 때 작품 설명을 보지 않고 가는 편이다. 현장에서 완전히 새로운 걸 마주했을 때의 자극을 오롯이 느끼고 싶다. 전혀 새로운 생각이 나를 강타하는 걸 즐기는 편이다. 그런 면에서 오늘 만난 서도호 작가님의 모든 작품은 내게 큰 영감을 주었다. 너무 많은 생각이 떠올라서 어지러웠을 정도다.
그냥 건물 벽면일 뿐인데 소화전에 이런 그림을 연결해 두었다. 역시 예술하는 사람들은 뭔가 달라도 한참 달라 생각하며 감탄한 부분이다.
잠시 서서 방황을 하고 있는 우리 눈앞으로 작은 남자아이, 그보다 좀 큰 여자아이 그리고 아이들의 아빠가 나타났다. 창문을 통해 무지개가 들어왔다. 여자아이는 그걸 밟아보고 싶어 하고 남자아이는 무지개의 근원지를 쫓아 창문으로 달려간다. 도저히 무지개의 방향을 알아채지 못하니 아빠가 아이에게 무지개를 설명하는 걸 듣는다. 제 손이 닿아 바닥에 무지개가 사라지는 걸 확인하고서야 자리를 뜬다.
처음부터 끝까지 황홀할 정도로 멋진 경험들을 가져다준 전시회였다. 나오는 길에 보이는 항만도 마음을 뒤흔든다. 여러 해변으로 가는 페리들이 분주하다. 햇살은 오늘도 눈부시다. 이렇게 시드니에서 사람들은 오늘도 여유로우면서도 바삐 생을 살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