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12-21
크리스마스이브부터 시작되는 홀리데이를 앞두고 나는 입사해서 두 달을 정신 못 차리게 바빴다. 내가 일하는 보트용품 취급 회사는 온갖 자질구레한 보트용품들을 끊임없이 호주 각지로 보냈다. 여름휴가를 즐기기 위해 보트 정비를 많이들 하고 있는 듯했다. 할 일이 없었다던 션의 말을 믿을 수 없게 나는 한시도 쉬지 않고 일을 해야 했다. 주문이 정말 물 밀듯이 밀려들어왔다.
퇴근할 때면 항상 이 주문서들을 보면서 퇴근을 했다. 주문이 이만큼 쌓여있구나. 내일도 역시나 일이 많겠네 하고. 오늘 처음으로 주문서가 없는 걸 봤다. 오전 내내 한가한 바람에 이러다가 퇴근하는 건가? 싶었을 정도다. 어슬렁 거리며 돌아다니다가 하릴없어 보이기는 싫어 빈 상자들을 주우러 다녔다.
길게 보면 이번주부터 홀리데이 주간이다. 그래서 토미나 셰인, 트로이 등 여럿이 휴가를 떠났다. 매니저가 지난주까지만 해도 오늘까지만 출근하라 하더니 오늘은 또 금요일까지 출근해도 좋단다. 근무가 이틀이나 늘었다. 홀리데이가 긴 만큼 조금이라도 더 일하면 좋다. 여기는 일한 만큼 돈을 벌 수 있으니 캐주얼로서는 일 시켜주면 땡큐다.
같이 일하는 거구의 코워커들에 비해서 나는 체구가 작아도 한참 작다. 처음에는 그래서 토미나 매니저가 무거운 건 들지 말고 옆에 있는 워커들한테 들어달라 하라고 당부했었다. 하지만 굴하지 않고 나는 그들과 비슷한 속도로, 비슷한 무게를 들어가며 일하고 있다. 그러니 다들 휴가로 자리를 비워도 나에게 일을 맡기는 것이다.
일을 길게 해 왔던 라쟈, 상품에 라벨링 작업을 하는 몰리를 제외하곤 창고에서 일하는 여자는 나뿐이다. 캐주얼로는 한 명 왔다가 도저히 무거운 박스를 들 수 없다며 바로 다음 날부터 출근하지 않았다. 그러니 일 못한다고 잘린 캐주얼들도 다 남자, 힘들어서 병가를 자주 냈던 캐주얼들도 다 남자다.
의아하지 않나? 동양에서 온 여자애 주제에 등치가 큰 백인, 흑인들과 섞여 제 몫을 해내고 있는 게. 왜 나는 이렇게 된 걸까. 일을 계속하면서도 잔뜩 무딘 내가 신기해서 계속 생각해 봤다. 결과적으로 나는 내가 시골에서 자랐기 때문에 이렇게 됐다는 결론을 냈다.
8kg짜리 양배추 망을 양쪽 옆구리에 끼거나 가끔은 세 개씩 들어가며 나르면서, 10kg짜리 매실 박스를 두 개씩 옮겨 가면서, 감과 복숭아가 잔뜩 들어가 있는 컨테이너 박스들을 옮겨가면서, 단련이 되었구나. 그것도 자주 무급으로 시달려(?) 왔다 보니 돈 받고 하는 이런 일은 더 즐거울 수밖에 없는 거구나.
여름방학 때면 조금 더 고상한 아르바이트를 하거나, 거의 쉬는 친구들을 보며 부러웠던 때가 많았다. 그에 비하면 우리 부모님은 악덕업주 같았다. 근처 문화생활 거리도 없는 산골에서 한두 달 지내는 걸로 당연하게 노동을 요구하다니. 학비, 기숙사비 걱정도 없이 한 달에 딱 15만 원씩 용돈만 타내서 받던 나는 내가 자식인 건지 그저 노동력인 건지 의심이 될 정도였다.
누군가의 눈에는 '그건 너무했지.'라는 생각을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이제 그때의 부모님께 감사하다. 그 덕에 나는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게 됐다.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게 되었을 때 장점은 같은 시간을 일해도 돈을 좀 더 벌 수 있다는 점이다. 자본주의의 아래 살아가는 우리에겐 돈이 중요하다. 나는 덕분에 돈 걱정을 하지 않고 살아온 지가 꽤 됐다.
풀타임 기본 시급을 받는 친구들이 일주일에 700불 정도 벌 때 나는 900불을 번다. 한 달로 따지면 한 주치 일한 만큼을 더 번다. 그 덕에 나는 호주에 와서 숙박비로 돈을 많이 쓰고도 중고차를 살 수 있을 만큼의 돈을 모았다. 아니었다면 한국에서 돈을 더 끌어와야 될 뻔했다.
나의 이런저런 걱정을 많이 잠재워준, 지금 직장에서 이렇게 일할 수 있게 된 이유가 어린 시절 무급 막노동 때문이라니. 세상은 참 알 수 없는 인과관계로 채워져 있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렇다면 내가 더 이상 피할 것이 있겠나 싶은 생각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