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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배 Zoe Aug 28. 2023

나는 당신을 믿으니까 그냥 차 주세요

22-12-22

홀리데이에 놀러 다니기 위해 중고차 사기를 서둘렀다. 한 3일을 둘러보다가 꽤 괜찮은 차를 발견했다. 하지만 차 금액은 내 예산에서 조금 초과다. 그래도 가진 스펙이 워낙 좋아 우선 인스펙션(중고차 점검 및 거래) 약속을 잡았다. 마침 네고가 가능하다고 적혀있으니 거길 가서 뭐라도 해볼 작정으로. 이름이 어쩐지 한국식과 비슷한 것 같기도 하고, 다른 거래는 트레인을 타고 한참 가야 하는 데에 비해 가까운 위치에 있다. 한인촌이 있는 소피의 집과도 가깝다.


그리고 트레인에서 내려 조금 걷는 사이 비가 오기 시작한다. 요 며칠 비도 잘 안 왔는데 하필이면 오늘 같이 중요한 날에. 비를 맞으며 걸으니 조금씩 귀찮음이 밀려온다. 비를 맞고 차 구석구석을 살펴보기가 영 불편할 것 같은 거다. 안 그래도 차를 잘 몰라서 세부사항을 살펴봐야 한다는 게 꽤나 스트레스이던 참이었다.


나는 도착해서 차 외관을 쓱 둘러보고 차 주인에게 "나는 당신을 믿을게요. 그러니까 더 이상 인스펙션은 필요 없어요"라고 말했다. 그랬더니 중국인 아저씨 캘빈은 나에게 이것저것 설명해 주기 시작했다. 서로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터라 캘빈의 영어는 알아듣기 쉬웠다.


"이 네비는 애플 카플레이고 안드로이드와 아이폰 모두 연결할 수 있어. 우리 아들이 이 차를 타려고 해서 700불을 주고 달아둔 거야"

"마찬가지로 아들이 탄다고 해서 엔진을 900불을 주고 새로 바꿨어"

"그런데 아들이 여자친구 태운다고 새 차를 사달라고 해서 저기 창고에 보이는 렉서스를 새로 뽑았지"

"그런데 너 차 이전 등록하는 법은 아니? NSW 주 사무소에 가서 신고해야 해"

"차는 운전하기 전에 보험을 꼭 들어야 해. 오늘, 내일은 내가 들어둔 보험을 해지하지 않을게. 우선 네가 집까지 끌고 갈 수 있도록. 대신 그 이후엔 해지할 테니, 차 보험 드는 거 절대 잊지 마!"


캘빈은 차의 온갖 장치들을 보여주고 설명해 줬다. 대뜸 믿겠다고 하며 차를 산다는 나를 걱정하는 모양새였다. 나는 차 상태보다 내 예산이 더 중요했다. 통장에 있는 돈보다 차 가격이 더 높다. 혹시 몰라 어제 추가 환전을 신청했는데 그건 소식이 아직이다.


"캘빈, 저는 인스펙션보다 예산이 더 문제예요. 지금 돈이 이것밖에 없는데 혹시 남은 돈은 며칠 뒤에 보내줘도 될까요? 그리고 혹시 네고도 가능할까요?"


이렇게 말했더니 캘빈은 잠깐 난감한 기색을 보이다가 "그래! 250불 깎아주고 돈은 며칠 뒤에 전부 받는 걸로 할게!"라고 답했다. 애플 카플레이가 달려있고 엔진을 바꾼 차인데 비해 다른 비슷한 연식의 차와 가격이 그리 차이가 나지 않는다. 나는 오늘 완전히 횡재했다.



캘빈 눈에는 내가 대책 없이 보였겠지만 나는 진짜 생각 없이 캘빈을 믿겠다고 한 게 아니었다. 우선 우리 집에서 가까운 만큼 캘빈은 좋은 동네에 살고 있었다. 시티 중심에서 멀어질수록 대체적으로 집 값은 조금씩 떨어진다. 다른 차들을 사려면 그렇게 먼 곳으로 가야만 했다. 나이 지긋한 중국인 아저씨 캘빈의 집은 2층 짜리 대저택이었다. 가라지에는 내가 사려는 차 말고 차가 두 대 더 있었다. 그중 하나는 엊그제 출고된 렉서스였다. 캘빈의 인상 또한 푸근하고 좋았다. 딱 봐도 쩨쩨하게 장난칠 사람이 아니란 걸 나는 알 수 있었다.



그렇게 두려움에 떨던 중고차 사기가 이렇게 번갯불에 콩 볶듯 끝났다. 단 한 번의 인스펙션으로 나는 차를 사서 돌아왔다. 차를 세워놓고 나니 기분이 조금 이상하다. 사실 오늘 일이 더 있었다. 그 일로 나는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이상한 감정들을 느끼고 있다. 왜 이렇게 좋은 사람들과 일들이 주변에서 끊이지 않는지, 엊그제부터 계속 생각들이 이어지고 있다. 한눈에 보고 사람을 믿을지 말지 결정할 수 있는 안목을 기를 수 있었던 이유 같은 것들에 대해.


데이고 당하고 어렵던 시간들이 이러려고 이랬나. 이러기 위해 그랬던 거였나. 어쩌다 보니 하나를 보면 열까지는 아니더라도 일고여덟까지는 볼 수 있게 됐다. 나에게 지금까지 세상살이는 구르는 일이었다. 경사진 곳과 울퉁불퉁한 곳을 계속해서 굴렀다. 지금까지 구르면서 울지는 않았지만 가끔은 원망스러울 때도 있었다.


'나는 왜 이렇게 세상 밖을 구르는 거지? 편안한 곳 안에서 지낼 수도 있는 거잖아.'

'편하게 나를 펼칠 기회가 있었다면 나는 더 잘되고, 더 잘 살았을지도 몰라'


공무원이 되고 채 몇 달이 안되었을 때 차를 사야만 했었다. 긴급하게 새벽에 다닐 일이 많아서 차가 없으면 눈치가 보였다. 중고차 사이트를 들락거리고, 딜러들을 만나고, 대출받기 위해 은행을 다녀올 때 부모님이 뽑아준 새 차를 타고 온 동기들을 보면서, 공무원 월급을 얼마 안 되니 다 저축하고 부모님 용돈을 여전히 타서 쓴다는 이야기들을 들으면서 앞선 생각을 종종 했다.


하지만 구르던 게 버릇이던 나는 호주에서 구르는 것도 개의치 않게 되었고 요즘엔 말도 안 되는 행운들을 거머쥐고 있다. 이런 운은 다른 사람들에게나 일어나는 줄 알았더니 요즘 나에게 그게 현실로 일어나고 있다. 인복이 있다는 말을 그리 믿어본 적 없었는데 올해 들어 느끼고 있다.


그러니 이제는 나에게 과거로 돌아가 더 편한 삶을 살게 해 준대도 미웠던 내 과거를 선택하겠다. 그 시간을 겪지 않았더라면 지금의 나는 없었다. 더 편한 환경에서 자라왔다면 지금의 나보다 더 나은 나는 없었다. 내가 일구어온 그때의 결과가 지금이라는 사실에 자꾸만 눈앞이 흐려지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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