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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배 Zoe Sep 04. 2023

완벽하게 시드니 파도의 거품을 수집할 거야

23-01-02

작년에 읽었던 책에 이런 문구가 있었다.


완벽하게 파도를 탈 거야. 그 파도의 거품을 가져갈 거야.
- 정세랑, 시선으로부터


기념품으로 파도를 수집하겠다는 마음이 인상적이었다.



오늘은 시드니의 해변 여행을 떠나기로 한다. 홀리데이가 얼마 남지 않았다. 저 멀리 보이는 본다이 비치에는 까만 머리통들이 빼곡하다. 하지만 오늘 내 목적지는 그곳이 아니다. 시드니에는 Coastal Walk가 있다. 본다이 비치에서 쿠지 비치까지 해변가를 따라 걸을 수 있는 산책로다. 쭉 걸으면 한 시간 정도 걸리는 아주 길지도, 그렇다고 아주 짧지도 않은 길이다.



아직 길의 시작점일 뿐인데 벌써 신이 나기 시작한다. 본다이비치에서 본 바다보다 이곳에서 본 바다가 훨씬 멋있다. 올여름 시드니는 이상하게 그리 덥지 않다. 작년에는 크리스마스쯤 기온이 40도까지 올라갔다고 했는데 오늘의 기온은 26도다. 게다가 습하지도 않은 이곳이니 걷기에 이렇게 좋을 수가 없다.



에메랄드 빛 바다가 바위에 부딪혀 연거푸 흰 거품이 된다. 이 광경에 압도당해서 멋진 표현을 생각해내지 못한다. 내 입에선 그저 "미쳤다... 미쳤다..."는 말만 계속 나온다. 돌틈새로 작은 꽃들이 피어 있는 모습조차도 황홀하다. 바위가 생긴 모습은 장엄하고 길이 굽어져 있어서 펼쳐지는 풍경이 더 극적이다. 굽이 걸어가다 보면 장면이 갑자기 바뀐다. 생각지도 못한 풍경들이 펼쳐진다.


사람들은 서핑을 하며 파도를 잡고 있다. 내가 읽었던 책에서도 등장인물은 서핑으로 파도를 담아보려 했다. 나는 오늘 걷기가 주된 목적이다. 그렇다면 내가 파도를 간직할 수 있는 방법이 뭘까? 모든 해변가에 발을 담가보며 시드니 바다와 악수를 할까 한다. 발끝에 바다 한 방울이라도 묻혀 돌아가고 싶다.



첫 도착 해변은 타마라마. 작은 해변이다. 화장실과 샤워실이 잘 갖춰진 데다 비치발리볼을 위한 장소도 꾸려져 있다. 경기를 하는 사람들이 계속 바뀌는 걸 보면 공공 이용 장소인 듯하다.



이런 풍경이 정말 이색적이다. 비치발리볼을 하는 사람들 앞 벤치에 앉아서 그들의 경기를 뚫어져라 관람했다.



다음 해변은 브론테. 가다가 그늘이 보이면 앉아서 책을 읽고 싶었는데 정말 멋진 곳을 발견했다. 이런 바위가 만들어준 그늘 아래서 사람들은 쉬어간다. 하지만 보통 수영복을 입고 있는 사람들은 햇볕 아래에 더 많이 누워 있다. 따갑지도 않은지 바싹바싹 자신들을 굽고 있다.



길을 걷다 보면 이런 곳이 또 신기했다. 큰 해변에는 해수로 만든 수영장이 꼭 있었다. 따로 입장료를 받는 곳은 안 보인다. 아마도 파도에 약한 아이들을 위한 장소이지 않을까? 딱 보기에도 가족들이 몸을 많이 담그고 있었다.



웬 바위에 사람들이 열심히 올라가길래 나도 따라 올라갔다. 지금 내 기분을 사진에 그대로 담고 싶었다. 그런데 사진이 아쉽다. 이보다 더 나는 날아갈 것 같이 가벼웠고 자유로움을 느꼈는데.



오늘을 기록하기 위해 셀카를 남기면서 문득 이상함을 느꼈다. 맞은편에 걸어오는 사람들의 손에는 아무것도 들려 있지가 않다. 심지어 가방도 보이지 않고 주머니가 튀어나와 있지도 않다. 도대체 그들의 핸드폰은 어디로 간 걸까? 그들은 그저 이 길과 해변을 온전히 흡수하는 것처럼 보였다. 아무런 기록 없이도.



클로벨라 비치. 이곳도 신기하게 생겼다. 마치 부두처럼 생겼는데 배는 없다. 야트막한 깊이인지 모래사장이 없는 구간에서도 사람들은 수영을 한다.



약간 경사진 곳을 골라 누웠다. 파도와 악수를 하다가 영광의 상처가 생겼다. 물에 발이 불려진 덕인지 슬리퍼의 가죽이 닿는 곳에 물집이 잡히기 시작한다. 책을 읽기 위해 그늘에 앉았는데 이곳은 해가 닿지 않는 자리는 바로 춥다.



자리를 옮겨보니 조선소 같은 곳이 나온다. 배를 고치는 곳인지 선착장인지 배들이 나란히 누워있다. 어쩐지  폐허 같이 느껴진다. 이곳은 고든스 베이.



신기해 보이는 사잇길로 들어왔는데 길은 해변으로 이어진다. 아까도 바위를 올라탔지만 해변으로 가는 산책길로 금방 이어졌더랬다. 이곳의 모든 길은 연결되어 있다.



Coastal Walk의 종착지인 쿠지비치에 도착했다. 작은 해변은 작은 해변 나름의 고요함이 좋고, 큰 해변은 큰 이유가 있다 싶을 만큼 쉴 공간이 많다. 쿠지는 규모가 큰 해변인 만큼 사람도 많고 주변으로 공원도 크게 조성되어 있다. 본다이 해변에 갔을 때도 신기했던 점이었다. 바다 바로 옆으로 잔디밭이 많아서 굳이 모래사장이 아니더라도 누워있을 공간이 충분하다.



여행은 감각적인 기억을 남긴다. 오늘 사진들은 내가 겪은 오늘 하루의 0.01%도 담아내지 못했다. 걸으며 만난 수많은 사람들과 강아지들이 있었다. 그들의 표정, 걸음걸이, 목소리 그 무엇도 사진에 나타나지 않는다. 나는 오늘부로 이 도시를 힘껏 사랑하기로 마음먹었다. 이 자연이 사진에는 전혀 담기지 않는다. 말도 안 되는 풍경을 품은 곳이 바로 시드니였다.


오늘 내 여행에는 향기 하나가 동행했다. 상큼한 향수를 입고, 귀로는 행복을 부르는 노래를 들으며, 나는 끝내주는 이 해변의 풍경을 공감각적으로 기록했다. 이곳을 나는 그렇게 간직했다. 오늘의 향기가, 노래가, 나를 단숨에 이 행복했던 해변으로 데려오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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