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용자 경험 인사이트
오늘은 전혀 다른 두 가지 상호작용을 예로 들어볼까 한다. 혼합현실의 상호작용과 아날로그적인 상호작용엔 어떤 차이가 있을까? 기술 발전의 흐름만 고려한다면 당연히 아날로그는 도태하고 실제보다 더 진짜 같은 혼합현실만 생존할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욕망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기술이 발전할수록 물리적 촉감, 즉 아날로그 감성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고 있다. 역사 속으로 사라졌던 LP판이 다시 대세로 등장한 현실이 이를 증명한다.
뿐만 아니라 의도적으로 촉각 경험을 살린 제품들이 등장한다. 화면을 터치하면 그만이지만 굳이 버튼을 누르도록 디자인한다. 음성으로 명령하면 간단할 텐데 괜히 몸을 움직여 특정한 동작을 요구한다. 아날로그와 레트로 트렌드의 흥행은 단순히 옛것의 그리움과 향수 때문이 아니라 디지털이 충족시켜주지 못하는 인간의 욕구, 즉 오감을 자극하는 상호작용을 촉진시키기 때문이다.
Chris Patty는 아버지의 크리스마스 선물용으로 홈메이드 주크박스를 제작했다.
투박한 디자인에 정해진 음악을 재생하는 것이 전부인데도 여러 매체에 소개될 정도로 화제를 모았다. 재미있는 사용성 때문이다. 앨범 아트와 곡명이 인쇄된 카드 중에서 듣고 싶은 곡을 고르고, SD 카드를 결제하듯 긁어서 음악을 재생한다. 원래는 NFC 카드로 제작하려고 했는데 단순히 저렴하다는 이유로 SD 카드를 선택한 게 오히려 신의 한 수였다. 비접촉식인 NFC 카드로 제작했다면 느낄 수 없었을 재밌는 물리적인 촉감을 SD 카드가 구현했기 때문이다. 현재는 뜨거운 호응에 힘입어 좀더 발전시킨 후 크라우드펀딩을 모집할 예정이라고 한다. 뛰어난 기능이나 성능보다 사용자의 촉각을 자극하는 상호작용 덕분에 성공한 사례다. 더 멋지고 효율적인 제품을 만드는 데 몰두하다 보면, 의외로 많이 간과하는 부분이 물리적인 상호작용이다. ‘가심비’라는 말처럼 기능과 가격이야 어떻든 만족감을 줄 수 있느냐가 사랑받는 제품의 조건이라는 것을 유념해야 한다.
혼합현실은 현실에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느끼게 한다. 한마디로 가상이다. 그런데 요즘 가상현실을 비롯해 증강현실, 혼합현실들이 점점 실제 세계처럼 디자인되고 있다. 시청각 위주로 설계되는 것이 아니라 후각, 촉각 등의 경험을 적극적으로 도입하고 있다는 뜻이다. 이런 변화는 물리적 세계, 아날로그 세계를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까지 변화시킬 것이 분명하다.
Seedling은 혼합현실 헤드셋인 매직 리프 원(Magic Leap One)을 착용하고 하는 식물 양성 게임이다. 현실 세계를 스캔하고 원하는 곳에 식물을 기르는 게 전부다. 다만 한 번 심어두면 그것을 기억한다. 다음에 접속할 때도 계속해서 그 공간에 심어둔 식물이 자라고 있는 걸 확인할 수 있다. 또, 햅틱 피드백을 지원하는 컨트롤러가 있어서 물을 주는 등 가상의 식물과 상호작용할 때 실제와 같은 촉감을 선사한다. 실제는 아니지만 물줄기의 감촉은 느낄 수 있는 것이다.
후각은 기억을 자극하고 촉각은 심리적 안정감을 준다고 한다. 인간의 오감은 단순히 외부 세계의 정보를 받아들이기 위한 수단이 아니다. 감정부터 판단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기술이 발전할수록 물리적 상호작용을 강조하는 흐름이 더욱 강해질 것이다. 이는 단순히 상품 개발의 측면에만 종속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마케팅을 하고 비즈니스를 전개할 때도 사용자와의 물리적 상호작용은 중요하다. 예전엔 사람들이 직접 기술 성능의 차이를 느낄 수 있었기 때문에 단순히 이를 보여주면 그만이었지만 지금은 그걸 오감으로 느낄 수 없다.
한계 민감도 감소 현상(Diminishing Marginal Sensitivity)이라는 게 있다. 자극의 강도가 높아질수록 구분하기가 어려워지는 현상이다. 기존엔 두 제품 간의 기술적 차이를 충분히 확인할 수 있었지만, 지금처럼 모든 제품이 웬만한 성능을 충족하는 상황에선 그렇지 못하다. 이럴 때 중요한 것이 감각 경험의 설계인 것이다. 혼합현실을 비롯한 각종 콘텐츠가 향기를 도입하고, 촉각 경험을 도입하는 등의 이유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기술적으로 뛰어나도 인간이 느끼지 못하면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물론 우려되는 상황은 있다. 혼합현실을 당연시하며 자란 아이들이 실제 세계를 어떻게 인식할까. 마냥 몰입적인 경험을 연출하는 것이 좋은 일일까. 실제 세계와 상호작용할 필요성이 점점 줄어들면서 비인간화되지는 않을까와 같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