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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 Jul 22. 2023

평범한 삶을 위한 변명

서머싯 몸, <달과 6펜스>를 읽고

언젠가 대나무숲에서 많은 이들이 인생작으로 추천한 책이 있었다. 바로 서머싯 몸의 <달과 6펜스>였다. 대체 어떤 책이길래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감명 받은 것인지, 다소 감성적으로 느껴지는 제목은 어떤 의미인지 궁금했다. 그때부터 이 책을 한 번 읽어보고 싶다고 생각만 하다가 이번에 친구의 제안으로 함께 읽게 되었다. 그렇지만 마지막 페이지를 읽고 책장을 덮을 때까지, 나는 이 책이 그들의 인생책이 된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조금 벙찐 기분마저 들었다. 이 책의 훌륭한 점을 열심히 피력하고 있는 작품 해설을 읽으면서도, 나는 그저 내가 범인(凡人)임을 다시금 느낄 뿐이었다.


이 책은 스트릭랜드라는 화가의 생애를 주변 인물인 ‘나’의 시점으로 서술한다. 스트릭랜드는 증권사에 다니는 평범한 회사원으로 살다가, 어느 날 그림을 그려야한다는 강렬한 열망에 사로잡혀 처자식을 떠나 가난한 화가의 삶을 살기 시작한다. ‘나’는 그의 부인의 부탁으로 그를 회유하려다 실패하고, 그에게 관심이 생겨 그의 생애를 지켜보게 된다. ‘나’의 눈에 비친, 그리고 독자인 나의 눈에 비친 그는 가히 그림 밖에 모르는 소시오패스였다. 주변인을 소중히 여기지 않았고, 악마에게 영혼이라도 판 듯 오직 자신의 충동이 이끄는 대로 행동했다. 하지만 그는 천재였고, 후대에 천재로 추앙 받았고, 그의 비인간적인 행적은 뛰어난 예술 작품을 남기기 위한 천재의 삶으로 그려진다. 그리고 그런 그의 삶을 담은 <달과 6펜스>는 많은 이들의 인생작으로 꼽힌다. 나는 나 혼자 이러한 세상에 섞이지 못하고 둥둥 뜬 기름 같았다.


내 주변에서도 스트릭랜드 정도는 아니지만 강렬한 삶의 방향성을 가진 사람들이 종종 있었고, 그때마다 나는 혼자 이질적인 존재가 된 기분을 느끼곤 했다. 가장 최근 경험으로는 얼마 전 아직 교대근무를 하던 때를 떠올릴 수 있겠다. 우리 부서는 24시간 내내 실험이 진행되어야 하기 때문에 4조 2교대 체제를 가지고 있었다. 보통 한 조는 3~5명으로 구성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나의 마지막 야간교대조는 조원의 건강 문제로 단 두 명 뿐이었다. 힘들긴 했지만 덕분에 같이 근무하던 분과 급속도로 친해질 수 있었고, 아무도 없는 조용한 사무실을 배경 삼아 업무 틈틈히 많은 얘기를 나누었다.


우리는 지금껏 다른 회사 사람들과는 하지 못했던 깊은 얘기도 하곤 했다. 예를 들면 미래의 꿈이나 가치관 같은, 가벼운 술자리에서는 쉽게 나누기 힘든 얘기도 새벽 3시 감성으로는 쉽게 할 수 있었다. 그 분은 실험이 재밌다고 했다. 평생 실험만 해도 좋다고, 실험하는 부서에 남아 있고 싶다고 했다. 그러면서 내게 어떤 일을 하고 싶냐고 물어봤는데, 딱히 대꾸할 말이 없었다. 그냥 “저는 돈 벌려고 회사 다니는 거지, 딱히 하고 싶은 게 없어요. 다 똑같죠 회사 일은.”라고 대답했다. 나는 그 순간 “저 열정 없는 사람이에요!”라고 고백한 것처럼 부끄러웠다. 그 말을 내뱉고 남은 뒷맛이 참 씁쓸했다.


그러다 조직개편으로 부서가 갈라지게 되면서, 나는 좀 더 고급 실험을 하게 되었고 그 분은 실험을 안하게 되었다. 안타까웠지만, 나는 회사는 월급을 주는 곳이니 회사에서 우리에게 바라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하고 싶은 걸 할 수 없는 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분은 차라리 아예 다른 실험을 하는 곳으로의 부서 이동을 택했다. 지금까지 해오던 이화학 실험이 아니라 미생물 실험을 하는 부서였지만, 실험을 할 수 있으니 괜찮다고 했다. 5년을 함께 한 정든 사람들, 익숙한 환경을 버리고 부서를 옮기기까지 하다니, 나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렇게 무언가 하고 싶은 게 있는 마음을 이해하고 싶었으나, 할 수 없었다. 나는 하고 싶은 게 없어서 회사에 온 거였다. 그렇지만 회사라고 다 나 같은 사람만 있는 게 아니었고, 동료들 중에도 하고 싶었던 일을 쫓아 입사하고 부서를 선택한 친구들이 있었다. 그런 얘기를 들을 때마다 나 같은 사람은 어디로 가야 하는 건가, 갈 곳 잃은 사람마냥 허망해졌다.


서울대라는 환경 탓인지 내 주변에는 유독 그런 친구들이 많은 것도 같았다. 나는 일찍이 취업을 선택했지만, 대학원을 다니느라 아직 학교에 남아 있는 친구들이 부러웠다. 나에게도 한때는 가능성이 열려 있었을 것이고, 간절히 바라면 갈 수 있는 길도 많았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가고 싶은 길을 찾지 못했다. 내 친구들은 관심 있는 분야를 찾아서 연구에 청춘을 바치고 있고, 그 중 소수는 모든 정든 것들을 두고 유학을 떠나기도 했다. 다른 것들보다 중요한 게 있는 그들이, 삶의 확실한 방향과 가치의 우선 순위가 있는 그들이 참 부러웠다. 그래서 나는 계속 방황하고 있는 듯한 조급한 기분이 들었다. 나도 그런 목표를 찾아야만 성공적인 삶을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둘 만의 야간교대가 끝나갈 즈음, 파트장님과 개인 면담을 하게 되었다. 그 때의 내 머릿속은 그 분의 부서 이동으로 인한 속상함과, 그 분과 대조되는 열정 없는 나 자신에 대한 주눅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래서 사실 직장 상사에게 할 얘기는 아니란 걸 알면서도, 요즘 어떻게 지내는지를 묻는 질문에 솔직히 털어놓고 말았다. 친하게 지내던 분이 부서를 옮기게 되어서 슬픈데, 한편으로는 그렇게 하고 싶은 것을 찾아가는 열정이 부러워요. 제가 너무 열정이 없나봐요. 이렇게 하고 싶은 게 없는 상태로 회사 생활을 파트장님처럼 오래 해나갈 수 있을지 걱정이에요…. 그 말에 파트장님은 정색하셨다. “저도 하고 싶은 게 없는데, 소연이 보기에는 제가 열정 없는 사람인가요?”  나는 도리질했다.


“저는 단지 저에게 주어지는 일을 열심히 할 뿐이에요. 그러다보니 다른 사람들이 다 떠나서, 어느 새 파트장까지 되었네요. 그렇지만 저는 제가 열정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것도 열정적으로 사는 하나의 방식인거죠. 사실 회사에 걸맞는 사람은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찾아가는 사람보다 오히려 맡은 일을 묵묵히 열심히 하는 사람이에요. 그 친구 같은 사람을 대단하게 볼 수도 있지만, 그건 우리는 대부분 그렇지 않기 때문이고, 저는 세상은 소연 같이 제 역할을 하는 사람으로 구성되어야 잘 굴러간다고 생각해요. 잘 하고 있어요.” 이 말은 내가 그토록 듣고 싶어했던, 하지만 내가 나 자신에게 해주지 못했던 말이었다.


이 책의 제목 <달과 6펜스>에서 ‘달’은 숭고한 본원적 가치를 의미한다. 반면 ‘6펜스’는 가장 하찮은 은화의 값으로, 천박한 세속적 가치를 의미한다. 서머싯 몸은 물질적인 것들을 등한시하고 자신이 원하는 삶을 찾아 떠나는 자유로운 스트릭랜드를 통해, 그렇지 못한 세속적인 인물들을 비판한다. 그렇지만 나는 이 책을 읽는 내내 왠지 반발하고픈 마음이 불쑥불쑥 치솟곤 했다. 아마 내가 바로 그 세속적인 사람 중의 하나이기 때문일 것이다. 스트릭랜드에게 분노했으나 그가 천재가 된 후에는 자랑스러워하는 그의 아내에게 공감했고, 돈 되는 싸구려 그림만 그리지만 이웃을 소중히 여기는 스트로보를 존경했다. 굳이 그들을 비판적으로 보아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나는 사람의 가치는 사회적 관계에서 온다고 생각하기에, 내게는 스트릭랜드보다 스트로보가 훨씬 가치 있는 인간으로 느껴졌다.


나는 ‘6펜스’를 폄하하는 세상 분위기를 바꾸고 싶다. 굳이 숭고하고 이상적인 달을 쫓을 필요 없이, 누구나의 주머니 속에 굴러다니는 6펜스를 만지작거릴 뿐이라도 충분히 성공적인 삶이라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아니, 애초에 삶에 우열을 따지려는 생각 자체가 없어졌으면 좋겠다. 어차피 세상 속에서 살 거면 남들과 다를 바 없이 세속적인 게 무엇이 문제일까. 굳이 남들에게 휩쓸리지 않고 독립적인 가치를 찾아야만 할까. 특별한 목표를 이루지 않아도 일상 속에서 최선을 다하며 더불어 사는 게 행복의 길이라는 가르침을 진작 받았으면, 나는 조금 더 나에게 만족할 수 있지 않았을까. 세상의 발전은 <달과 6펜스>를 인생책으로 삼는 사람들에게 맡겨두고, 나는 내 자리에서 좀 더 행복한 세상을 위해 노력하는 것으로. 그렇게 내 인생의 가치를 믿어주고 싶다.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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