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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 Sep 28. 2023

때로는 '팩트체크'보다 '공감'이 필요하다

주말에 독서모임 친구들과 강화도 여행을 다녀왔다. 그런데 대화를 나누다가, 내 성격의 특징 중 하나를 뚜렷하게 깨달았다. 바로 내가 ‘팩트’를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사실이었다.

시작은 강화도로 가는 차에서 이루어진 사소한 대화였다. 친구 A가, 얼마 전 모임 파티에서 어떤 언니가 끈이 없는 상의를 입고 왔는데 예다는 말을 했다. 그런데 내가 똑똑히 기억하는 그 언니의 상의는 끈나시였다. 그래서 나는 태클을 걸었다.

“아냐, 그 옷 끈나시였어.”
“아냐, 끈 없었는데?”
“끈 있었다니까? 내가 확실히 기억해.”
“없었어.”

이 지점에서 나는 친구 A가 이해가 안 되기 시작했다. 왜 이상하게 기억해 놓고 확신을 가지지? 나는 그 언니와 친했기 때문에, 그 언니가 그 옷을 입은 걸 자주 봐서 그 옷이 끈이 있다는 확신이 있었다. 그래서 “팩트체크해.”하면서 그날 찍었던 사진을 찾아내서 그 옷이 끈나시였다는 것을 확인했다. 내 말이 맞았음을 증명한 나는 의기양양했지만, 그 “팩트체크해.”라는 내 단호한 말투는 여행 내내 밈이 되어서 놀림을 받았다.

이 일은 사소한 해프닝이었다. 그렇지만 그렇게 한 번 내가 ‘팩트체크’를 하려고 하는 사람이라는 걸 인식하고 나자, 여행 내내 계속 그런 상황들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긴가민가한 상황이 생기면 나는 사실이 무엇인지 명확한 답을 찾고 싶어서 검색하거나 과거의 기록들을 뒤적였다. 그렇게 증거를 확인해야만 직성이 풀리는데, 사실 다른 친구들은 이미 그것에 별 관심이 없었다.

보드게임을 할 때도 그랬다. 팀을 짜서 상대팀과 겨루는 게임이었는데, 게임의 전개가 엉킬 때마다 나는 그 엉킴의 시작점이 무엇인지를 찾아보고 싶어 했다. 누군가의 잘못을 찾아내서 탓하려는 건 아니었다. 내가 잘못했던 경우도 있었다. 나는 그냥 단지 궁금했다. 왜 이런 상황이 벌어진 것이며, 이러지 않으려면 어떻게 했었어야 하는지, 뭐가 최선의 전략이었는지. 그렇게 복기해서 다음 판에서는 같은 상황을 피하고 싶었을 뿐이다. 그런데 몇몇 친구들은 그렇게 원인을 찾아내는 것을 책임을 추궁하는 것으로 느껴서 불편해했다.

갑자기 내가 너무 사회성이 부족한 사람으로 느껴져서 덜컥 겁이 난 나는 나 자신을 돌아보기 시작했다. 그냥 넘어갈 순 없었을까? 그 언니가 입은 옷에 끈이 있든 없든 사실 중요하지 않았다. 나는 그 친구는 그냥 그 언니가 예뻤다는 말을 하고 싶었을 뿐인 그 발화의 맥락을 충분히 이해한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지 사실과 다른 부분을 고치고 넘어가고 싶었을 뿐이다.


지금 와서 찬찬히 생각해 보면, 그 친구와 나 사이에 더 도움이 됐을 만한 건 ‘팩트체크’가 아니라 ‘공감’의 리액션이었을 것이다. 혹은, 말을 좀 더 부드럽게 했어야 했나? “그 예뻤지, 근데 그거 끈나시였어~”라고 했으면 좀 덜 딱딱해 보였을까? 정말 다른 사람들은 이 상황에서 그냥 별 신경 안 쓰고 넘어가나? 그럴 수 있나? 이런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진다.

MBTI가 대중적으로 퍼지면서 좋은 점 중 하나는 이런 상황에서의 우리의 간극을 쉽게 이해하게 만들어준다는 점이다. 아마 우리의 MBTI가 극과 극이기 때문에 벌어진 입장 차이였을 것이다. 나는 분석적인 성향이 강하기 때문에, 납득이 안 되는 상황을 싫어해서 계속 ‘왜?’라는 질문을 던진다. 세상에는 나 같은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세상에는 나와 다른 사람도 많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나의 이런 면이 누군가를 불편하게 만든다면 좀 누그러뜨릴 필요가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때로는 그냥 넘길 수 있는 일은 넘기자. 설령 그게 사실이 아니라 하더라도.

얼마 전 읽은 테드창의 단편집 <숨>에 실린 작품, <사실적 진실, 감정적 진실>이 떠올랐다. 그 작품에서는 ‘사실적 진실’과 ‘감정적 진실’이 같지 않을 수도 있으며 객관적 사실이 무조건 옳은 진실은 아니라고 분리해서 설명한다.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가 제대로 와닿지 않았었는데, 이번 주말을 보내며 조금은 알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사실 관계를 파악하는 것이 최선은 아닐 때가 앞으로도 많을 것이며, 때로는 최선을 위해서 사실을 눈 감아야 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런 때가 오면, 빈말도 선의의 거짓말도 못하는 나는 이 진실밖에 말하지 못하는 저주에 걸린 입을 좀 다물어 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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