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이라는 것의 의미
추석 연휴를 보내며 느낀 것
이번 추석 연휴는 내게 가족의 소중함을 느끼게 해준 시간이었다.
기차표를 미리 예매하지 못한 탓에 연차를 써서 하루빨리 본가로 내려와서는, 그대로 앓아누웠다. 긴 연휴를 앞두고 몰아치는 업무를 처리하느라 계속 심야근무를 한 데다가 주말에도 쉬지 않고 무리를 하긴 했다. 내려가는 고속버스에서부터 유독 몸이 으슬으슬하더니, 구미에 도착하자마자 꼼짝없이 몸살이 나버렸다. 첫날 내리 16시간을 잔 뒤, 이틀 내내 침대에 누운 채 무의미한 유튜브 클립만 주구장창 봤다. 읽으려고 가져간 책, 써야 할 글, 운동하려고 가져간 러닝화는 꺼낼 수조차 없었다.
진정 휴가를 즐기려면 일단 생활공간에서 벗어나라고 했던가. 이제는 방학 때 할머니댁 놀러 가듯 비일상적인 이벤트가 되어버린 명절 본가 방문은, 어쩌면 내게 적절한 휴식의 기회였던 것 같다. 평소에 나는 벌려놓은 일이 많아서 잠도 줄여가며 시간을 빡빡하게 쓰는 편인데, 이번 연휴는 아픈 김에 그냥 원 없이 쉬어야겠다는 마음으로 째깍째깍 바쁘게 돌아가던 머릿속 시계를 스탑 했다. 그리고는 그냥 먹고 자고 쉬는데 집중했다.
내가 맘 편히 그럴 수 있었던 것은 기꺼이 내 손이 되어준 엄마가 있었기 때문이다. 잠만 자는 나를 보며 회사 일이 힘들었나 보다 측은했던 엄마는 거의 환자 병시중 들듯이(사실 진짜 환자가 맞긴 했다) 끼니때마다 밥을 챙겨주고 온갖 수발을 들어주었다. 혼자 살면서 아플 때마다 밥 챙겨 먹는 게 곤욕이었는데, 손 하나 까딱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게 어색하면서도 너무 편했다.
그렇게 꼬박 이틀이 지나고서야 외출할 수 있을 몸상태가 되었다. 마찬가지로 명절이 되어 내려온 고등학교 친구들을 만나러 갔는데, 늦은 저녁에 만나는 거였기에 돌아오는 게 조금 걱정이었다. 우리 집은 조금 외진 곳에 있어서 버스가 밤 10시만 되면 끊기기 때문이다. 내가 막차 걱정을 하는 걸 본 아빠가, 자기가 데리러 가면 되는데 뭘 걱정하냐고 했다. 새벽까지 놀다가 돌아오고 싶을 때 연락하라고 했다. 그래도 나는 아빠한테 미안한 마음에 좀 머뭇거렸는데 아빠는 내 머뭇거림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게 뭐 별거냐고 했다.
대학에 입학하면서 시작된 나의 타향살이는 이제 햇수로 만 10년이 다 되어간다. 그동안 나는 나도 모르게 혼자라는 게 당연해졌나 보다. 내 일거수일투족, 내 안위를 걱정하고 살피는 사람은 보통은 오직 나뿐이었다. 가족하고도 연락을 거의 하지 않는다. 무엇을 먹고 무엇을 사고 어떻게 집에 돌아가고… 그런 하나하나의 의사선택 과정을 혼자 해버릇하다 보니 가끔 집에 내려가서 부모님과 부대끼다 보면 가족이라는 공동체가 생경하게 느껴지곤 했다. 혹여나 민폐가 될까 봐 주변 사람들에게 뭔가를 부탁하는 것도 어려워하는 내게는 편히 부탁하고 맡길 수 있는 가족의 품이 유독 포근하게 느껴졌다. 특히 이번 연휴는 길었던 탓에 더더욱 그 느낌이 크게 와닿았던 것 같다.
날씨가 좋았던 추석 당일은 아빠와 둘이 강변을 산책하고 카페에 가서 시간을 보냈다. 둘이 오래 시간을 보내는 것도 굉장히 오랜만이었다. 올해 초에 돌아가신 할머니 얘기, 어릴 적 놀러 갔던 얘기, 동생과 동생 여자친구 얘기, 강아지 얘기… 등등 얘기를 하는데 주변에 아이를 데리고 나온 부부들이 많았다. 문득 아빠한테 물어봤다. “아빠는 나랑 동생 태어나고 언제가 제일 좋았어? 어릴 때 데리고 놀러 다닐 때가 제일 좋았나?” 그 말에 항상 무덤덤한 우리 아빠는 “글쎄, 뭐 다 똑같지.”하고 말았다.
오늘 인천으로 돌아오는 버스를 타기 위해 터미널로 가는 길까지 아빠가 또 데려다줬다. 이런저런 시답잖은 얘기를 하다가, 터미널에 도착하기 직전에 갑자기 아빠가 어제 내가 물어봤던 질문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고 했다.
“언제가 젤 좋았냐고 했제. 나는 소연이 너 고등학생 때가 젤 좋았던 거 같다. 일주일에 한 번씩 기숙사에 너 데리러 갔던 때. 그때가 젤 얘기 많이 했잖아.”
그 말을 듣는데 머리를 한 대 맞은 듯했다.
나는 고등학교를 기숙사에서 다녔는데, 매주 아빠가 데리러 오고 데려다줬었다. 그리고 주말에도 공부한다고 도서관 오갈 때도 아빠가 태워줬었다. 아빠는 그때가 나랑 가장 대화를 많이 했던 때인 것 같다고, 그 오가는 길에 군것질하면서 일상 얘기를 나누던 때가 가장 좋았던 때라고 했다. 그런데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대학 가서 눌러앉아버린 딸은 좀처럼 전화도 안 하며 살고 있다.
버스 출발 시간이 가까워졌기 때문에 대충 아빠한테 잘 지내라고, 가서 연락하겠다고 인사를 하고는 버스를 탔다. 곱씹을수록 눈물이 났다.
자식을 가져본 적이 없는 나는 그 마음을 짐작할 수조차 없다. 내가 아빠를 생각하는 마음은 아빠가 나를 생각하는 마음에 비할 바가 못될 것이다. 내게 살면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묻는다면 아빠와 가장 돈독했던 그때를 답할 자신이 없다. 나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내 삶이고, 나는 지금의 내 삶도 충분히 행복하고, 앞으로도 더더욱 행복할 거라고 믿는다. 본인 삶의 가장 소중한 것을 나라고 말하면서 멀리서도 오매불망 본인들의 행복보다 나의 행복을 더 바라는 그 마음을 절대 알 수가 없다. 그래서 감사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무서웠다. 내가 앞으로 부모님과 얼마나 더 시간을 보낼 수 있을까. 도대체 그 마음의 얼마만큼을 보답할 수 있을까. 언젠가 자식이 생겨서 그제야 이해할 수 있게 되면, 너무 늦어버리는 건 아닐까. 그런 생각들로 인천으로 올라오는 마음이 미어졌다.
나는 대체로 독립적으로 살아왔다고 생각했다. 학창 시절 공부도 스스로 한 편이었고 크게 손을 벌리지도 않았다. 대학을 결정하고, 진학하고, 취업해서 지금에 이르기까지 크고 작은 일을 부모님과 상의하기보다 혼자 결정했다. 그런데 이번 연휴를 지내고, 그동안 그렇게 세상에 홀로 태어난 것처럼 여기며 살아온 내가 너무 부끄러웠다. 내 살아온 발걸음 하나하나에 엄마 아빠의 보살핌이 있었는데 내가 외면했던 것은 아닐까.
항상 이런 생각 끝에 남는 다짐은 그저 노력해야 한다는 것뿐이다. 내가 지금 행복한 것은 부모님 덕분이니까 부모님도 나로 인해 행복할 수 있도록 해드려야지. 그 마음 그대로 돌려드리기에는 택도 없을 테니까 그저 최대한 노력해야지.
혼자 사는 게 부쩍 외롭게 느껴지는 요즘이었다. 내게도 든든한 가족이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고, 외로우면 엄마 아빠한테 전화해야겠다. 절대 본가로 돌아가서는 못 살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본가에서 사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마저 잠깐 스쳤다. 연휴 동안 맛본 가족의 품이 따뜻했던 탓이다. 자취방에 돌아와 혼자 보내는 밤이 유독 외로운 것도, 조금은 덜 외로운 것도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