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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페쉬플랏 May 10. 2016

어슬렁, 타테이시

도쿄 외곽, 어슬렁대기 좋은 동네 게이세이 타테이시 여행기


 "에-? 게이세이 타테이시?"
 나리타 공항에서 게이세이 타테이시 역으로 가는 열차표를 달라고 했을 때, 매표원 아주머니의 반응이었다. 그녀는 내가 입을 떼기도 전에 신주쿠? 시부야? 하고 물었던 참이었다. 그럴 만도 하다. 나 역시 도쿄를 여행했던 사람들 중에 타테이시에 묵었다는 사람도, 타테이시에 가봤다는 사람도 보지 못했으니까. 내가 여기에 머물기로 한 건, 순전히 가격 대비 너무 훌륭해 보이는 숙소가 있었기 때문이다.

게이세이 선의 타테이시역

 숙소의 위치가 눈에 들어온 것은, 널찍한 다다미방에 테라스까지 딸린 이 숙소를 누군가 채 갈까 봐 초스피드 결제를 하고 난 뒤였다. 웹사이트의 안내에 따르면 신주쿠나 시부야까지 42분이라고 했다. 도어 투 도어로는 1시간쯤 걸린다는 이야기다. 우리 일정에는 시부야에서 열리는 공연도 있었다. 하루 종일 돌아다니다 공연에서 미친 듯이 놀고 지하철을 갈아타며 한 시간이라. 음, 이걸 친구들에게 뭐라고 해명한다? 그때부터 나는 검색에 착수했다. 아무것도 없는 곳에 괜히 여행자 숙소가 있을 리가 없어. 분명  마이너 한 감성의 무언가가 있을 것이야...     

 검색 결과는 다양하지는 않았지만 만족스러웠다. ‘b급 구르메 동네'라는 평이 전반적이었다. 타테이시는 싼 값에 술 먹기 좋은 동네였던 것이다. 이 이야기를 전하자 친구들도 반색했다. 내 그럴 줄 알았다. 유유상종이라는 말은 괜히 있는 게 아니었다.   



 여유로운 벚꽃 엔딩

 엄청나게 친절한 숙소 주인 가족은 엄청나게 맛있는 사과주스를 우리에게 대접 한 뒤, 약도와 함께 동네의 즐길 거리들을 소개했다. “투마로. 레인. 사쿠라. 투데이. 피니쉬.” 아, 내일은 비가 와서 벚꽃이 다 떨어질 테니 오늘 구경하라는 말이구나. 사실 우리는 그 날 우에노 공원에 가서 벚꽃 구경을 할 예정이었지만 동네에도 예쁜 벚꽃길이 있다니, 나가는 길에 한 번 들러 보기로 했다     

일드의 한 장면 같았던 순간

 우글우글하게 피어난 벚꽃은 워낙 좋아하지 않는다. 벚꽃 핀 곳마다 우글우글하게 따라붙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타테이시의 벚꽃은 부는 바람 따라 청순하게 지고 있었다. 벚꽃 터널 아래를 걷는 사람들은 힘차게 자전거를 몰고 가는 할아버지, 세탁물을 찾아 어깨에 척 걸치고 가는 동네 아저씨, 슬리퍼 차림으로 달랑달랑 비닐봉지를 들고 집으로 돌아가는 커플이었다. 그러니까, 이거 클리셰라면 클리셰인데, 영상미 죽이는 일본 드라마 안에 들어온 기분이었다.      

사진의 제목은 간바레 오지상!



타테이시의 밤

 우리는 도쿄에서 할 일이 많았다. 아무리 우리 취향이라고 동네에서만 3박 4일을 보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누군가는 스시를 먹어야 했고, 누군가는 회사 동료들의 기념품을 사야 했으며, 누군가는 유명하다는 카페에도 가봐야 했다. 들뜬 기분으로 복잡한 도쿄의 지하철 노선을 더듬거리느라 피로에 지친 우리는 게이세이 타테이시 역에 당도해 습기 머금은 훈훈한 공기를 맡을 때마다 안도감을 느꼈고,숙소에 도착하면 욕조에 뜨거운 물을 받아놓고 무릎까지 담갔다. 편의점에서 사들고 온 산토리 위스키와 탄산수로 하이볼을 만들어 곁들였다. 목욕물은 찰랑찰랑, 잔 속 얼음은 깔랑깔랑 소리를 냈다.      

 찬바람에 굳었던 어깨도 좀 풀리고, 신발을 뚫고 나올 듯 부어올랐던 발도 어느 정도 해결이 되고 나면 우리는 옷을 챙겨 입고 다시 거리로 나섰다. 골목에는 소규모 포장마차나 서서 마시는 술집들이 빼곡했다. 가게마다 맛있는 냄새와 웃음소리가 새어나왔지만 일본어도 할 줄 모르고 동네 사람도 아닌 우리는 문턱 높은 고급 레스토랑에서처럼 좀 기가 죽었다. 헝클어진 정장 차림의 샐러리맨들 사이에서, 외국인 여행객 세 명은 그다지 환영받을 존재가 아닌 것만 같았다. 이런저런 이유로 첫째 밤은 치킨 가라아게에 맥주 한잔으로 간단히 마무리했고, 둘째 밤은 너무 지쳐 그냥 잠이 들었다.


모츠야키로 유명한 에돗코

 해 진 뒤 타테이시의 진가는 마지막 날 밤에 만끽할 수 있었다. 집주인들이 추천해 준 모츠야키 집 ‘에돗코’라는 가게에서였다. 꽤 넓은 가게를 꽉 메운 사람들 사이에 겨우 자리를 잡고 가타카나로 쓰인 메뉴들을 무의미하게 훑어보던 내 등을 누군가 톡톡 두드렸다. 돌아보니 30대 중반으로 보이는 한 남자가 “하이” 하며 악수를 건네고 있었다. 이런이런. 우리끼리 마시러 온 건데 귀찮게 하지 말라고. 그때 친구가 팔꿈치로 나를 쿡 찌르며 말했다. “집주인이네!” 혼자 얼굴이 빨개진 나는 그제야 내민 손을 잡으며 알은체를 했다.  

 그가 괜찮은 메뉴를 알아서 주문해 주어 대창구이, 닭고기 구이, 미트볼 등을 맛볼 수 있었다. 가끔씩 그의 일행이 먹는 메뉴가 맛있어 보여 그게 뭐냐고 물어보면 그는 우리 쪽으로 자신의 접시를 건네주었다. 아무리 사양해도 소용이 없었다. 젓가락으로 접시를 가리키며 ‘미. 에브리데이.’라고 할 뿐이었다. 그때마다 우악스러운 여주인은 알 수 없는 일본어로 그에게 화를 냈고, 우리는 모두 웃었다. 위스키가 아닌 일본 소주가 들어간 하이볼을 두 잔 정도 비우고 꽤나 취기가 오르자 에돗코의 폐점시간이 다가왔다. 근처에 집주인 친구가 하는 가게가 있다고 해서, 딱 한 잔만 더하기로 했다.

에돗코의 시로(대창)구이

 빨간 내벽과 까만 스툴의 대비에 더 취할 것만 같은 그 가게에는 그의 친구들 둘셋이 더 와 있었다. 일본 소주 한 잔씩을 손에 들고도 용케 손짓 발짓으로 그들과 대화를 이어 나갔다. 짧은 영어나 몸짓으로 안 되는 대화도 물론 있었다. 일행 중 한 아저씨(미안합니다. 별다른 특징이 생각나지 않아서.)는 번역기를 사용해 ‘가라오케에서 삼십 분만 놀자’고 제안했다. 우리도 번역기로 대답했다. ‘미안합니다. 내일 일찍 츠키지 시장에 가서 성게알 덮밥을 먹어야 합니다.’ 아저씨는 끈질겼고 우리는 ‘쏘리, 츠키지 시장..’을 반복했다. 이 끝날 것 같지 않던 번역기 실랑이는 집주인의 중재로 잘 마무리되었고, 모두들 웃으면서 헤어졌다.   



정육점 앞에서 콩고물 기다리는 중

타테이시에는 (내가 아는 한) 관광할 만한 데가 전혀 없다. 알고 보니 가난한 아티스트들이 모여 산다더라 하는 힙한 동네도 아니다. 짬짬이 들렀던 가게들 중에 ‘숨겨진 미친 맛집!’이라고 할 데도 그다지 없고 ‘일본인들의 일상에 파고들고 싶다면 꼭 들러야 할 동네!’라고 소개하기도 좀 뭐하다. 지상으로 다니는 전철이 있고 꽤 괜찮은 한가한 벚꽃길이 있으며 길고양이가 정육점 앞에 턱 받치고 앉아 콩고물을 기다리는 동네, 주머니가 가벼워도 걱정 없이 술 한 잔 걸칠 수 있는 동네 일 뿐이다. 그럼에도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나는 쓸데없는 고민을 시작했다. 다음에 도쿄에 오면 또 타테이시에 묵을까, 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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