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페쉬플랏 Aug 16. 2021

눈부신 만큼 지나치게 비싼 도시에서

오늘의 단어: 여행

 K가 진심으로 내게 화를 낸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베네치아를 여행 중이던 우리는 비엔날레 자르데니 한편의 테라스에서 피자와 맥주로 늦은 점심을 먹고 있었다. 나는 민감한 주제를 꺼내어 열변을 토했고, K는 너무 과장해서 생각하는 것 아니냐고 했다. 내가 한 치의 의심 없이 믿는 생각에 오랜 친구가 반론을 펴자 열이 뻗쳤다. 따가운 햇볕에 옅은 취기가 날카롭게 올라왔다. 나는 흥분한 줄 모른 채 흥분했고, K는 너는 그렇게 생각하렴, 하고 말을 잘랐다. 몇 분이 흐른 뒤 K의 가라앉은 목소리가 침묵을 깼다. 너를 사랑해, 하지만 방금 네 태도는 받아들이기 어려웠어.


 만난 지 10년이 넘은 사이였고 단 둘은 처음이었지만 종종 함께 여행했기에 우리는 상대의 성향을 잘 알고 있었다. 서로 꼼꼼히 배려했다. 자기가 하고 싶은 것만 하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사람도, 모든 일에 손 놓고 게으름을 부리는 쪽도 없었다. 그래서 갑작스러운 이 다툼이 더 당황스러웠다.


 물론 우리는 금세 평소의 태도로 돌아왔다. 남은 일정도 더 이상의 불화 없이 평온하게 흘러갔다. 애초에 이 신경전이 왜 벌어졌을까 곱씹을 때면 내가 진심으로 K를 믿기 시작한 게 그즈음부터여서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K에게 정말로 화를 낸 건 나 역시 그때가 처음이었다는 생각도. 보통은 극도로 조심스러운 성격인 내가 거리낌 없이 평소의 생각을 털어놓았고 기대하지 않았던 반응이 나오자 그 서운함과 실망을 감출 수 없었던  것이다. K와 나의 관계는 이후로도 크게 달라진 게 없지만, 어쩐지 그때 우리가 벗어낸 한 꺼풀 정도 더 가까워진 기분이다. 눈부신 만큼 지나치게 비싼 도시에서, 겹겹이 쌓인 피로와 취기, 무작정 튀어나온 진심이 여행의 가장 선명한 한 장면을 만들었다.

작가의 이전글 하루를 시작하는 한 접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