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로이메라이 (Traeumerei)
https://youtu.be/6z82w0l6kwE?si=NKFiYqasXhE6BC7X
"누구에게나 사랑의 순간은 아름다운 것이죠. 물론 저도 많지는 않지만 행복한 사랑을.. 했었죠. 그리 행복한 결말은 아니었지만..."
아름다운 피아노 선율과 함께 처음으로 푸른 수염 선생님이 자신의 이야기를 잠시 할 때 나는 조금이라도 놀란 기색을 보이지 않으려 애를 썼다. 그런 내 마음을 눈치 챘는지 그는 헛기침을 여러 번 한 후 화제를 돌리려고 하였다.
"우리의 상담이 그래도 한 달은 진행되었는데, 환자님은 아직도 1단계의 방에 머물고 있는 것 같습니다. 모든 상황을 부정하는 거죠. 좋았던 기억만 떠올리려 애쓰고, 그 기억 속에서만 머물고 싶은... 마치 하루하루가 꿈 속에서 흘러가듯 몽환적이고 자신만의 동굴 속에 들어가서 다른 어떤 외부적인 자극도, 상처도 받고 싶지 않으려 하는 그런 현상이죠.
물론 잘못한 것이 아니랍니다. 누구나 슬픔을 이겨내는 단계가 필요한데 저는 그것을 5개의 방이라고 칭하고 있어요. 제 책을 좀 읽고 오셨다고 하시니, 원래 이 이론은 제가 만든 것은 아니구요. 부정, 분노, 타협, 우울, 수용의 순서로 진행된다는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라는 분이 만드신 이론이죠. 저는 그 이론을 조금 더 확대하여 이별뿐만 아니라 인간 관계와 상실에 대한 부분을 5개의 방을 하나씩 들어가는 과정을 함께 진행하여 조금더 수월하게 이 아픔에서 벗어나고자 한답니다."
최면이라도 하겠다는 건가? 방을 들어가다니? 그래도 나는 한 달의 상담이 흘러가는 동안 하나의 발전도 없는 것인가에 대한 회의가 살짝 있었던 상황이라, 마지막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이렇게 질문하였다.
"그럼 저도 그 5개의 방을 지나면, 이 질긴 인연의 그를 잊을 수 있을까요?"
그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뭐, 잊지는 못하더라도 무던해지는 것은 물론 가능해질 것입니다. 그럼 이제 더 지체하지 말고 첫 번째 방, 부정을 벗어나기 위한 이야기를 시작하죠."
그렇게 나는 도망치듯 떠난 외국에서 만난 소중한 사람들과 몇몇의 만남, 그리고 또다시 이어진 상실에 익숙해질 즈음, 한국에 돌아왔고 익숙해진 낯선 교정에서 그의 빈자리조차 느끼지 못할 정도로 최대한 빨리 졸업을 하고 취직을 한 이야기를 짧게 건냈다. 그리고 우연히 회사 엘리베이터 안에서 그를 마주하기까지의 이야기를 마쳤을 때, 똑똑~ 문 두드리는 소리에 푸른 수염 선생님은 실수했다는 표정과 함께 "아~ 항상 5시에 오시는 환자분이 오늘 7시에 오시기로 했는데.. 죄송합니다 깜빡했네요"란 말을 건냈다. 그렇게 나는 화들짝 놀라 현실로 돌아왔고, 마치 부끄러운 치부라도 드러낸 듯 도망치듯 계단을 뛰어내려왔다.
몇 시간이 흘렀을까.. 상담을 진행하는 동안은 와인 한 잔도 마시지 않겠다는 생각에 따뜻하게 차를 내리고 낙엽이 거의 다 떨어진 어두운 밤거리를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어떻게 나를 떠나버릴 수 있지? 내 모든 것을 바쳤는데! 왜!!! 어떻게?!!!!" 만취한 것일까? 화를 내고 소리를 지르는 남자의 목소리와 함께 뭔가 깨지는 것 같은 소리와 행패를 부리는 그 사람을 피하는 듯 사람들의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하긴, 이 동네는 푸른 수염 상담 센터만큼 외진 곳은 아니지만 그래도 골목이 많은 외진 곳이니 위험하긴 할거야란 생각과 함께 한참을 소란스러운 바깥을 두꺼운 커튼으로 가려버렸다.
마치 악몽과 나의 아늑한 이 작은 방 한 켠을 분리하고 싶은 마음처럼.
그리고 켠 TV 속 재방송인지 알 수 없는 드라마 속에서 주인공이 연주하는 피아노 곡이 슈만의 트로이메라이라는 것에 조금은 재밌다는 생각이 들며 점점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아까 상담때 나온 음악과 너무 신기하다.
근데 비틀거리며 술에 취한 채 소리를 지르는 남자의 목소리가 낯설지 않은 것은 왜일까?
그 때의 나는 앞으로 일주일이란 시간동안 벌어질 일들의 신호탄이었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