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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주 Mar 29. 2021

뼛속까지는 아니더라도

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 - 나탈리 골드버그

글을 쓰는 분들이 가슴에 품고 있는 책 중에 하나인 나탈리 골드버그 '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는 오래전에 도서관에서 잠깐 훑어본 책이다. 그러다 최근에 브런치 작가님들의 글에 이 책이 몇 번 언급되는 걸 보고 나도 천천히 완독 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1월에 출간된 장편소설 <하는, 사랑>(링크)은, 출간되고 보니 검색에 꽤 불리한 제목이다. 쉼표가 중간에 떡하니 있는 것도 그렇지만, '하는'과 '사랑'의 키워드는 너무 많이 쓰이기 때문이다. (검색하면 온갖 종류의 하는 사랑이 나오는데, 특히 혼자 하는 사랑이 압도적으로 많다) 다행히 책 표지가 대표 사진으로 걸려있으면 눈에 띄어서 독자님들의 서평을 읽을 수 있다. 


서평을 쓰신 분 중에는 브런치 작가님도 몇 분 계신데, 그중에 '더오드' 작가님이 쓰신 서평(링크)을 보다가 이 '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라는 책을 발견했다. 서평에 이 책이 언급된 건 아니고 어떤 분의 답글에 더오드 작가님이 달아놓은 댓글에 등장한다. 


책이 언급되는 그 댓글의 문장만 옮겨오면 다음과 같다.  

'글을 쓰려면, 뼛속까지 내려가서 쓰라는(나탈리 골드버그) 책이 있었는데... 이 책을 읽으며 정말 이야기를 쓰려면 이렇게 써야 하는구나, 무릎을 타악~ 치고요.....'

정말 말도 안 되는 칭찬이 쓰여있어서 몇 번이나 되짚어서 다시 읽었다. 


내 책을 읽으면서 뼛속책을 떠올리셨다니, 그렇다면 나도 이 책을 천천히 완독해 보리라.

당장 책을 구해서 와 닿는 구절을 노트에 적으면서 읽었다.  

이 책은 2월에 읽었는데, 읽을 때는 얼른 브런치에 써야지 해놓고 벌써 3월이 다 지나간다. 


최근에 나는 글쓰기의 슬럼프에 (깊이) 빠져 있다. 

'형편없는 글은 안 쓰는 게 낫다' 이런 식의 자조에 푹 절어져 있었는데, 이 글을 쓰면서 극복해보고자 한다.


뼛속까지는 아니더라도, 나탈리 골드버그가 책에서 거듭 강조하는 것처럼 그저 꾸준히는 써야 한다. 

중요한 건 그것이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뼛속까지 내려가 있을지도.


옮겨 적은 구절이 다섯 페이지나 된다.





두 달 전에 꽤 괜찮은 글을 썼다고 해서 앞으로도 좋은 글을 쓴다는 보장은 없는 법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언제나 새롭게 글을 써야 하는 운명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솔직히 나는 새로운 글을 쓸 때마다 전에 어떻게 글을 완성했는지 의아해질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글쓰기는 매번 지도 없이 떠나는 새로운 여행이다. (p.20)


동감. 석 달 전 탈고와 동시에 출간된 제법 두꺼운 내 책을 보면 이토록 많은 글자들을 어떻게 썼는지 모르겠다. 뿌듯함 그런 느낌이 아니고 말 그대로 의아한 느낌이 든다. 게다가 이 양을 스무 번 가까이 돌려 썼다는 것이 전적으로 남의 일만 같다. 지금은 한 페이지의 브런치 글도 올리기 힘드니까. 

주제를 정해서 써보고자 했지만, 번번이 실패하고 있는 중이다. 찔딱거려 놓은 글이 열 꼭지도 넘는데 저것을 완성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자신의 지난 글이 꽤 괜찮다고 자평하는 것은 힘들다. 물론 누군가는 괜찮다고 생각하고 기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도 대부분의 작가는 이제는 고칠 기회가 없는 자신의 글을 다시 보면 못마땅한 부분만 보일 것이고, 그 때문에 슬럼프에 빠지는 게 아닐까 생각한다. 그래서 출간 후에는 한동안 글을 못쓰게 되는 것 아닐까. 



방금 쓴 글을 읽기 위해 손을 멈추지 말라. 편집하려 들지 말라. (쓸 의도가 없는 글을 쓰고 있더라도 그대로 밀고 나가라), 문법에 얽매이지 말라. 마음을 통제하지 말라. 생각하려 들지 말라. 두려움이나 벌거벗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도 무조건 더 깊이 뛰어들라. (p.26)


나에게 필요한 조언이다. 글을 쓰면서 자꾸만 되짚어서 읽고 고치는 것이다. 도돌이표처럼 반복한다. 

한글파일에서 빨간 줄이 쳐지면 띄어쓰기를 고치고, 사전을 들춰본다. 그러느라고 써야 하는 이야기가 증발되는데, 그걸 잘 알면서도 그런다. 그러느라고 조금밖에 못쓰고 좌절하는 것인데도. 

생각하려 들지 말고, 이야기가 곁길로 새어 나가도 (힘들겠지만) 그냥 써야 한다. 빨간 줄은 나중에 한꺼번에 처리하면 된다. 



글쓰기 훈련은 육상 선수가 스트레칭을 하는 것과 똑같다. 육상 선수라면 "난 어제 뛰었어. 그러니 오늘은 워밍업을 할 필요가 없어."라고 말하지 않는 법이다. (p.31)

그것이 무엇이든지 그대로 적어 내려가라. 제발 어떤 기준에 맞춰 글을 조절하지는 말라. 손을 멈추지 말고 계속 쓰기만 하라. (p.35)


같은 맥락의 이야기들. 

하지만 어제 시합을 뛴 육상선수나, 어떤 글쓰기의 과정을 완료한 작가가 며칠은 쉴 수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ㅎㅎ

물론 나탈리 골드버그도 글자 그대로 어제와 오늘을 말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퍼지려면 한없이 퍼져버릴 수 있으니까 얼른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라는 이야기다. 달리기나 글쓰기에 필요한 근육이 빠져버리지 않도록!



'이건 글을 쓰기에 좋고, 저것은 이야깃거리가 못 된다.'라는 식의 생각은 버려야 한다. 작가는 두려움없이 무조건적으로 모든 것을 써 낼 수 있는 용기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p.74)


어떤 주제를 쓰기도 전에 그런 걱정이 든다. 이 얘기 다른 사람들이 다 했을 텐데... 게다가 사람의 경험이란 게 다 거기서 거기니까 이미 지겹고 뻔한 이야기일 것만 같다. 근데 그렇지 않은 주제가 있을까? 

그런 면에서 과거의 처절했던, 어쩌면 비극적인 경험은 가장 좋은 글쓰기 주제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작가에게는 비극도 희극도 다 좋은 것이라는 얘기가 있는 것이다. 물론 그걸 써야 좋은 것이다. 



'나는 문학성 높은 은유적 표현을 써야 해.'라는 생각은 떨쳐버리라. 절대 의도적으로 문학적인 표현을 쓰려 하지 말라. (p.75)


내가 글을 쓰 때, 특히 소설을 쓸 때 유념했던 것이다. 어쩐지 소설에는 더욱더 높은 '문학적 은유'를 독자들이 기대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그런 것을 잘 못하는 사람이고, 심한 은유에는 재채기가 나올 것 같은 성격이라서 독자들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일부러 은유를 썼다가는 아주 우습게 보일 것이 자명했다. 우러나오지 않은 은유, 은유를 위한 은유는 누구에게나 끔찍한 것이다.



글을 쓸 때는 모든 것을 풀어 주라. 아주 쉬운 말로 단순하게 시작하고, 당신 속에 깃들어 있는 것을 그대로 표현하도록 애써라. (p.78)


'쉽게 써라.' 이 문장은 글쓰기 관련된 글에는 무조건 나오는 것 같다. 나는 이걸 가슴에 아로새기고 있는데, 어렵게 쓸 능력이 없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짧게 쓰세요, 쉬운 말로 쓰세요... 모두가 얘기하지만 여전히 쉬운 문장은 조금 괄시하는 경향이 있는 것도 같다. 유시민 작가의 말처럼 '있어 보이고 싶은 사람'만이 굳이 어렵게 쓴다는 걸 늘 명심하자. 



얼마나 다급한지 충분히 이해는 한다. '나는 책을 쓰고 있는 중이야.'라는 말을 하며 살기를 원하는 사람들. (중략) 글쓰기는 맥도널드 햄버거가 아니다. 패스트푸드가 아니라 슬로푸드다. (p.79)


슬로푸드라는 말에 동감이다. 다급하다고 어찌해볼 수가 없는 일이다. 다급해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지만, 다급하다고 더 많이 더 잘 써질까?  

글쓰기는 가장 고차원적인 행위이면서 생산성은 가장 낮은 일이다. (물론 생산성이 무척 높은 작가들도 꽤 있지만) 대부분의 작가는 글을 써서 생계를 할 수가 없다. 생계를 위한 일을 하면서 또 끊이지 않는 집안일의 굴레 속에서 기어이 짬을 내서 글을 한쪽씩 써 내려가는 우리 같은 사람에게 글은 베리베리 슬로 푸드다. 


그러니 '나는 책을 쓰고 있는 중이야'라는 말은 대작가에게나 가능한 것 아닐까?  지금 쓰고 있는 글은 거의 무조건 책이 되는 사람들 말이다. 아직 대작가는 아니더라도 생산성이 한 번이라도 무지 높았던 작가, 그래서 차기작을 내놓기만 하면 되는 작가들 말이다.


변방의 작가인 우리는 글을 쓰고, 그것을 엮어서 다듬고 또 다듬고, 부단히 다듬은 다음에야 조심스레 출판사에 투고를 해보는데, 그것은 거의 매번 계란으로 바위 치기이다.



작가는 의미 없어 보이는 삶의 작은 부분들마저도 역사적인 것으로 옮겨 놓을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중략) 덧없이 지나가 버리는 세상의 모든 순간과 사물들을 사람들에게 각인시켜 주는 것, 그것이 작가의 임무이다. (p.89)


세부 묘사를 사용하면 당신이 느끼는 환희나 슬픔을 아주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다. 세부 묘사야말로 글쓰기의 기본 요소이자 단위이다. (p.93)


더 깊이 들으려 하면 할수록 더 좋은 글을 쓰게 될 것이다. 아무런 편견 없이 사물이 가는 길을 받아들일 때 그 사물에 대한 진실한 글이 태어난다. (p.103)


작가는 모든 소문과 지나가는 이야기를 귀담아들을 책임이 있다. (p.138)


'작가는 듣는 사람'이라는 말이 있다. 주위의 모든 이야기들을 귀담아 들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열린 마음과 비판하지 않는 태도가 필요하다. 작가는 잘 듣고 잘 관찰하고 그냥 지나칠 많은 것들을 눈여겨보고 의미를 찾아야 한다. 세부묘사를 위해서라도 자세하게 정성껏 보고 듣고 생각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스쳐 지나가는 모든 것이 전부 다 내가 글로 표현할 수 있는 이야기이므로.



우리는 정직한 지원과 격려를 원한다. 그러면서도 막상 누군가 칭찬을 해 주면 그 말을 믿으려 하지 않는다. 반대로 비평하는 소리를 들으면, 너무나 쉽게 받아들이고 결국 자신은 별 볼 일 없고 진짜 작가도 못 된다는 쓸데없는 믿음만 키워가려 한다. (p.113)


누군가 당신을 칭찬해 준다면, 정말 그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아무리 그런 일이 익숙하지 않고 계면쩍더라도, 계속 숨을 들이마시고 귀를 기울이고 그 말을 받아들여야 한다. (p.114)


칭찬에 익숙하지 않다. 누군가 칭찬을 해도 나 들으라고 하는 칭찬일 거라는 생각을 하고, 그래서 나를 전혀 모르는 사람의 반응이나 서평을 조금 더 신뢰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아주 작은 비평의 소리는 확대 해석하여 크게 받아들인다. 이 책에 나오는 것처럼 진짜 작가도 못 된다는 믿음을 키우는 것이다. 누군가가 그렇지 않다고, 너의 글은 좋다는 그런 구원의 말을 계속해주어야만 수렁에서 겨우 나올까 말까이다. 

지지, 격려의 말, 칭찬의 말을 이제는 좀 믿자. 그런 말들을 영양제처럼 빨아들이고 그 힘으로 다시 쓰도록 노력해야 한다. 



말하지 말고 보여주라. 이것은 분노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고서, 무엇이 당신을 분노하게 만드는지 보여 주라는 뜻이다. 당신의 글을 읽은 사람이 분노를 느끼게 하는 글을 쓰라는 뜻이다. 독자들에게 당신의 감정을 강요하지 말고, 상황 속에서 생생하게 살아 있는 감정의 모습을 그냥 보여주라는 말이다. (p.122)


독자들에게 감정을 강요하지 말라는 건 굉장히 어렵다. 

무지 재미있었다. 라고 쓰지 말고, 상황 묘사를 통해서 독자가 무지 재미있었겠다 라는 걸 느끼도록 해야 하는 거다. 말이 쉽지.... 

이건 무척 많은 연습과 훈련이 필요한 부분이겠다는 생각이 든다. 



누군가의 글에서 '대하여'라는 단어를 볼 때 나는 시끄러운 자명종 소리를 들은 기분이 든다. (p.123)


이 문장을 보고 깜짝 놀라서 <하는, 사랑>의 pdf파일을 열어서 검색해보았다. 

휴~ 다행히 '대하여'는 0번. 370쪽짜리 장편에서 대하여는 한 번도 없었다. 

혹시나 해서 '대해서'로 검색해보니 웬걸, 16번이나 나왔다. '대해'는 19번이 나왔고. 

비슷한 것도 검색해 보았다. '관하여'는 0번, '관해'는 6번,  '관해서'는 0번이다. 

대해서가 들어간 문장을 어떤 식으로 고칠 수 있을까 고심해봐야겠다.



'창가의 꽃'이 아니라 '창가의 제라늄'으로 묘사하는 편이 훨씬 좋다. '제라늄'이라는 단어 하나가 훨씬 구체적이고 생생한 영상을 만들어 내고, 우리가 그 꽃의 존재 속으로 더욱 깊이 들어가게 도와준다. (p.125)


이것도 세부묘사에 해당하는 것이다. 어쨌든 독자가 구체적인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건 중요한 일이니까. 독자가 글을 읽고 장면을 떠올릴 수 있는가는 중요하다고 들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구체적이어야 한다.

내 소설에서도 식물이 나오는 부분을 예로 들자면, 

칼라테아 잎을 앞뒤로 반짝반짝하게 닦으면서 던진 느닷없는 질문을 남편은 용케 새겨듣고 잠시 생각하더니 대체로 그럴 것 같다고 했다.    <하는, 사랑> p.73

처음에는 그냥 화초 잎을 앞뒤로 닦는다고 썼다가 칼라테아로 바꾸었다. 벌레가 생겨서 칼라테아 퓨전 화이트의 잎을 닦다가 소설 속 묘사도 칼라테아라고 바꾸었다.

고등학생 시절에 파르페를 먹기 위해 친구들과 들락거리던 카페가 단박에 떠오르는 곳이었다. 카페 가운데에는 큰 셀로움과 고무나무 화분이 있고, 그 주변으로 레자 소파와 테이블들이 놓여 있었다. 점원이 작은 메뉴판과 물이 담긴 유리컵을......    <하는, 사랑> p.239

여기서도 굳이 셀로움과 고무나무 화분을 가져다 놓았다. 밥을 먹으러 나갔다가 동네 미용실 앞에 거의 죽어가는 커다란 고무나무와 셀로움 화분을 보고 '매우 큰 화분'을 구체적으로 바꾼 것이다. 안쪽으로 보이는 레자 소파도 한몫했고.   



지금 세상에 나온 책들 가운데 출판조차 못 했을 뻔한 책이 아마 수천 권도 넘을 것이다. 우리에게는 그저 계속 가야만 한다는 진실이 있을 뿐이다. 작가가 되고 싶다면, 쓰라! 설령 그 글이 출판되지 않더라도 또 다른 글을 계속해서 쓰라. 훈련은 당신의 글을 점점 더 훌륭하게 만들어줄 것이다. (p.181)


작가가 되고 싶다면 쓰라! 이 말은 좀 틀렸다. 

출판되지 않더라도 계속 써야 (언젠가는) 작가가 될 테니까 쓰라는 말 아닌가? 계속 쓰는 훈련을 해야 글이 훌륭해져서 결국은 출판이 되어 작가가 될 테니까 계속 정진하라고 하고 있으므로 이 말은 틀렸다. (계속 쓰면 점점 더 훌륭해질 거라는 말만큼은 진리의 말씀이지만!)

이 문장은 이렇게 고치고 싶다. 

"계속 작가이고 싶다면 쓰라!"

매일 쓰는 사람은 출판 여부와 상관없이 작가 타이틀을 줘야 마땅하다.


그런데 원고를 투고했다가 출판사에서 승낙의 메일을 받아본 사람은, 그래서 출판까지 되었던 (운이 좋은) 사람은 예전과 같은 맘으로 글 쓰기가 어렵다. (저만 그런 걸까요?) 

늘 하던 블로그 포스팅도 이제는 오타가 있으면 안 될 것만 같고, 이 정도의 글을 쓰는 사람이 출간 작가라고? 하면서 누군가가 흉보진 않을까 걱정도 하고 말이다. 

또 지금 쓰는 글들이 나중에 출간될 수 있을지, 그 말도 안 되는 가능성을 타진해 보느라 더 못쓰고 진이 빠지는 것 같다. 

'이제 나는 고갈됐어. 내 글이 출판되는 일은 더는 없을 거야.' 더 이상 실망할 일도 기뻐할 일도 없다는 암시를 내게 주느라 바빠서 더더욱 제대로 된 글을 쓸 수가 없다. 


물론 반대인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제 나는 출간 작가야. 더 좋은 글을 써야지!'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아~ 이런 사람은 얼마나 행운인가. 



두 달에 한 번씩 글쓰기를 그만두고 싶은 마음과 부딪힌다. '어리석은 짓이야. 돈 한푼도 벌지 못하면서 그럴싸한 경력도 쌓지 못하고 있잖아. 바보 같은 짓이야. 나도 다른 사람들처럼 살고 싶어.' (p.181)


그럼요, 그럼요. 돈도 안 되고 그럴싸한 경력도 쌓지 못하는 잘 안 팔리는 작가는 작가도 아닌 걸요. 

자조의 늪에 빠진다. 



글쓰기는 지독하게 외로운 것이다. 누가 이 글을 읽어줄까? 한 사람이라도 관심을 보일까? (p.233)


나는 어떤 확신도 없는 채로 아무에게도 보여줄 수 없는 원고를 일 년 넘게 붙들고 써본 사람이다. 지금의 나로서는 내가 어떤 마음과 열정으로 그렇게 했는지 모르겠다. 다시 그럴 수 있을까? 회의적이다. 하지만 그것이 외롭지는 않았다. 누군가가 관심을 보여줄까? 읽어줄까?를 생각해보진 않았다. 그저 완성하는 것이 지상 목표였다. 

하지만 사람에 따라서는 지독한 외로움을 느끼기도 하는 것 같다. 몇몇 작가의 글을 보면 그런 글들이 있다. 

브런치의 '좋아요' 버튼도 그 외로움에 한몫하는 것 같고. 


나도 물론 구독자가 늘고 좋아요가 많으면 좋다. 하지만 그것에 큰 의미를 두지는 않는다. 좋아요의 숫자와 상관없이 내 글 한 꼭지를 끝까지 다 읽어주는 이는 정말 소수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애초에 공감이나 댓글이 많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고, 내 글이 다음(daum)의 메인 페이지에 올라도 그뿐인 걸 몇 번이나 겪기도 했기 때문이다. 또 그런 나이이기도 하고 말이다. 


그래도 내 책을 읽은 독자, 내 글을 끝까지 읽은 구독자의 생각은 항상 궁금하고, 그들과 소통하길 바란다. 



만약 당신 책을 출판하겠다고 하면 아주 잘된 일이지만, 그것에 너무 신경쓰지 마십시오. 당신에게는 그냥 지나가는 일입니다. 계속해서 글을 쓰는 데에만 정신하십시오. (p.279)


정말 어려운 일이다. 이 책을 썼던 그 시절에는 출간하고 나면, 그걸로 끝이었을 것이다.

작가는 쓰는 사람이고, 출판과 판매는 출판사의 일이었으니까. 물론 베스트셀러가 된다면 인터뷰도 해야 하고, 여기저기서 찾는 곳이 있으니 바빠지겠지만 말이다. 


요즘은 얘기가 다르다. 출판사에서는 작가가 책을 팔아주길 바라는 것 같다. 그러니까 팔로워가 많은 사람에게 출판사가 먼저 출간을 제안하는 일이 생기는 것이다. 그 사람의 포스팅을 보고 알아서 기획을 한 후에, 책을 내자는 제안을 하기도 하는 것이다. 그만큼 팔로워의 파워란 대단한 것일까? 팔로워가 다 책을 사 주는 것도 아닐 텐데.... 어쨌든 그 영향력을 믿는 것이다. 

이게 다 출판시장이 너무 어려워서 그런 거다. 

책을 읽는 사람은 반토막이 났지만, 작가가 되고 싶은 사람은 수십 배가 늘어난 것도 그 이유가 될 것이고.


작가가 책 판매에 크게 신경 쓰지 않고, 그저 숙명처럼 글만 쓸 수 있는 세상이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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