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을 쓰고 싶다면 (the art of fiction) - 제임스 설터
제임스 설터의 <소설을 쓰고 싶다면(the art of fiction)>은 몇 달 전, 글을 쓰지 못하고 있는 이른바 글럼프 때 읽은 책이다.
제목에 소설이라고 박혀 있지만, 소설을 쓰는 법에 국한된 내용이 아니고 글쓰기를 하는 모든 사람에게 도움이 될만한 글이다.
내 독서 노트에 꾹꾹 눌러 적은 문장들을 나를 위해서, 또 내 글을 읽으실 몇 분의 독자를 위해서 브런치에 다시 옮겨 적어본다. 이는 다시 한번 나와 동지들을 독려하기 위함이다.
인스타나 블로그를 보면 온 세상에는 책 읽는 사람만 잔뜩인 것 같지만, 베스트셀러를 제외한 책들의 판매고는 바닥을 치고 있다. 그리고 막상 주위에는 책 읽는 사람이 드문 것이 현실이다. 특히 청소년 층에서는 책 읽기를 숙제 말고는 거의 하지 않아서 언어의 폭이 굉장히 좁아지고 있다고 들었다. 유튜브는 봐도 책은 못 보는지, 유튜브에서 남용되는 언어 외의 표현은 하지 못한다는 개탄의 소리도 있었다.
나도 트위터에 썼지만 '찢었다', '미쳤다' 같은 말이 너무너무 싫다. 이 말은 놀람, 좋음, 대단함, 멋짐 같은 감정의 대체어로 쓰이는 것 같은데, 얼마 전 티브이를 보니까 자막으로도 저 단어가 쓰이고 있어서 놀랐다.
역사 감각은 말할 것도 없고 공감의 측면도 그렇다. 꼭 어떤 능력을 키우기 위해 책을 읽는 것은 아니지만, 소설을 읽으면서 각자의 등장인물에 굉장히 몰입하게 되는데, 그러면서 키울 수 있는 공감 능력이 있다. 다양한 삶에 들어가 볼 수 있다. 그런데 요즘은 책을 통해 뭔가를 얻으려는, 얻어야 한다는 심리가 팽배하기 때문인지 소설을 더욱 읽지 않는다.
어디선가 소설을 잘 읽지 못하는 이유에 대한 놀라운 글을 보았다. 그 이유인즉, 소설에는 대화가 많이 나오는데 이 대화가 지금 누구의 말인지 알기 위한 노력에 굉장히 피로해지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정말 그럴까? 그렇다면 너무 놀라운 지점인데...
쓰고 있는 글에 대한 감식력을 가지려면 정말 많은 글을 읽어보는 수밖에 없을 것 같다.
그리고 수정! 수정! 수정!!!!
이 글쓰기 매거진에서도 고쳐쓰기에 대해 많이 썼다. 내가 퇴고의 중요성을 완전히 체득한 것은 1월에 출간한 장편소설 <하는, 사랑> 때문이다.
그전까지는 '퇴고란 지겨운 것'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면(그러니까 퇴고를 많이 하지 못했다), 이 장편소설을 쓸 때 거의 스무 번에 가까운 퇴고를 하면서 '퇴고의 맛'을 알게 되었다. 할 때마다 오류를 발견해서 고치고 거의 다 외울 문장들을 읽고 또 읽으면서 썩은 콩을 골라내듯 글을 망치는 단어를 골라내는 과정은 약간 희열 비슷한 것이었다.
물론 때로는 너무 지겨워 지쳤지만(그렇다고 형벌이라는 말은 가당치도 않다) 그래도 내 글이 좋아지는 것이 확연하니까 해나갈 수 있고 즐길 수도 있다. 문제는 내가 멈출 수가 없기 때문에 누군가가 그만 하라고 멈춰줘야만 한다는 것이다.
퇴고의 과정을 무척 싫어하는 분들이 있다. 단지 지겹기 때문은 아닐 것 같다. 글이 좋아지는 게 너무 확연한데 지겨움 정도는 극복해야 마땅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마음이 조급해서일까? 빨리 투고를 해서 결과를 얻고 싶다는 절박함 같은 것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거의 맞춤법 검사만 하는 방식으로 퇴고하고 서둘러 투고하는 경우도 볼 수 있는데, 그럴수록 오히려 선택의 가능성이 좁아지며 (믿기지 않지만 물론 몇 번의 퇴고만으로도 충분하리만치 글이 좋은 분들도 있을 것이다.)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는 데까지의 여정은 더 길어질 것이다. 오죽하면 6개월 묵혔다가 퇴고하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우연히 서점에서 자신보다 먼저 출간한 지인의 책을 본 감정을 쓴 것인데, 부러워서 뼈가 아플 지경이었다는 솔직한 감정이 와닿는다. 열패감도 그렇고. 이런 마음을 지닌 채 그의 책을 읽으면 '이런 건 나도 쓰겠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출판사의 선택을 받아 출간까지 된 글인데도 말이다. 아는 사람은 내 글을 더 좋게 읽어줄 수도 있지만, 오히려 내 글과 내 책을 폄하하기도 쉽다. 왜냐하면 아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 사람을 잘 안다는 건 글을 읽는데 방해가 되기도 한다.
생활 대신 글쓰기를 할 수 있는 사람은 운이 좋다. 전업작가(전업작가라는 건 신의 영역 같다)가 아닌 한 생활 대신 글쓰기를 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결혼한 사람이라면 아무래도 남자가 약간 더 유리할 수 있다. 나만해도 남편이 정말 많은 집안일을 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활을 해나가는 주체이기에 집중할 시간은 만만치 않다.
왜 글을 쓰는가!
글쓰기가 너무 좋아서? 자아실현을 위해서? 생각을 정리해 두려고? 이런 이유도 있겠으나 모두가 원하는 것이 있다. 속으로 생각하는 것이 있다. 그것을 제임스 설터는 당당히 말한다.
진실의 종아 울려라. 글 쓰는 사람은 모두가 사랑을 원한다. 내 글이 많은 사람에게 사랑받기를 간절히 원한다. 아무리 잘 쓴 글도 남이 읽어주지 않으면 글쓰기 동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책도 마찬가지다. 너무 많은 책들이 소리 없이 묻히고 마는데 그것이 정말 안타까운 지점이다.
어쩌다 발견한 보석 같은 책, 무슨 일인지 판매도 시원찮고 전혀 알려진 것도 아닐 때가 종종 있다. 나도 이렇게 안타까운데 작가는 오죽할까.
자신이 보거나 듣거나 느낀 것들을 소재로 지니고 있어야 한다는 것에 동감한다. 소설의 모든 부분 부분은 크건 작건 작가의 경험에서 비롯된 것들이다. 그렇지 않다면 엄청난 취재와 공부를 통해 정말 잘 알게 된 것에 대해서 쓴다. 소설을 보면 얼마나 많은 취재와 사실 확인이 있었는지 단박에 눈에 보이는 책이 있고, 또 어떤 상황에 대해 인물의 생각이나 감정에 얼마나 깊이 파고들었는지 보이는 책이 있다. 어느 경우이건 모두 치열하게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쓰고 또 썼다는 것이다.
쓰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을 때보다, 내가 쓴 글에 실망할 게 두려워서 시작을 못하는 경우가 더 많은 것 같다. 오늘 하루 겨우 시간을 내어서 이따위 글을 쓴 나에게 또 실망하고 싶지 않은 거다. 성공한 작가들도 이런 생각을 한다는 것이 더 내가 좌절하는 지점일 수도 있다.
온전한 기쁨은 글을 점검해서 좋게 만들어보는 기회에서 오는 것! 이것이 핵심 아닌가 생각한다.
내 글을 점검하고 이리저리 매만져서 더 좋게 만드는 것. 이 놀라운 기회가 작가에게는 있다.
상황이 이러한데 수정의 과정이 싫다, 못하겠다, 안 하겠다고 툴툴 거리는 건 작가로서의 기본 자질 문제 아닐까.
어서 초고를 다 쓰고, 내 글을 좋게 만드는 퇴고의 과정에 어서 들어가기만 바란다.
처음 몇 번까지는 거지 같은 나의 글을 계속 마주해야 한다는 점에서 퇴고는 어렵다. 점점 더 기쁘게 해 나가겠지만 처음은 우울의 구렁텅이에 빠져든다.
'글이 이런데 어떻게 투고를 하겠어.', '이걸 누가 읽어주겠어.', '난 어림도 없어.'
내가 나에게 준 상처만으로도 차고 넘쳐서 남에게 보여주기 전까지 계속 마음에 예방주사를 놓는데, 효과가 별로 없다. 결국은 극복하고 남에게 보여줄 만하게 될 때까지 고치는 수밖에.
이 부분은 북토크 때도 인용했었다. 내가 소설을 쓰면서 완전히 자각한 것도 모든 소설은 작가의 경험이 바탕이 된다는 사실이었다. 소설은 천부적인 이야기꾼이 머릿속에서 재미난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거라고 생각했던 시절이 있었다. 그래서 소설은 어림없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천부적인 이야기꾼이 아니니까. 하지만 소설가는 머릿속에서 이야기를 만드는 게 아니라 머릿속에 들어있는 보고 듣고 경험한 것들을 버무려 끄집어낸다. (어쩌면 그게 더 어려울지도)
이러니까 더더욱 낙담하는 거다. 편혜영 작가가 이런 말을 하면 어떡하란 말입니까.
하지만 뒤집어 생각해 보면 이런 작가들도 이러한데, 내가 실망하고 좌절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 아닌가!!! 그러니까 그냥 받아들이고 앞으로 나아가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