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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주 Feb 04. 2022

지독한 고질병, 체면

체면(體面) 사전에서 찾아보면 ' 대하기에 떳떳한 도리나 얼굴'이라고 나온다. 

떳떳한 도리? 내가 생각한 것과 차이가 나는 설명이다. 체면을 부정적으로만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실 체면을 체면치레의 뜻(체면이 서도록 일부러 어떤 행동을 함)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요즘 말로 표현하자면 '모양 빠지지 않게' 혹은 '있어 보이게' 정도가 아닐까. 


사람이라면 물론 어느 정도는 체면을 생각하며 산다. 체면 따윈 나 몰라라 하며 염치없이 구는 사람은 많지 않다. 하지만 체면을 굉장히 과도하게 중시하는 사람은 꽤 있다. 

체면을 과하게 중시하는 사람은 나를 전혀 모르고 내게 관심도 없고 다시는 만나지 않을 사람 앞에서도 체면을 차려야 성에 찬다. 매장 직원이 나를 하찮게 볼까 봐(혹은 그런 것 같아서) 필요도 없는 옷을 몇 벌이나 사 가지고 나왔다는 얘기도 들었다.


지금 육아에 관한 원고를 쓰고 있는 중이라 내내 키우는 일을 생각하는데, 문득 '체면'에 대해서 짧게라도 써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를 키움에 있어서 매우 나쁜 것 중 하나가 ‘체면치레’이기 때문이다.

체면은 매우 지독한 고질병이다. 딱 들러붙어서 웬만하면 떨어지지 않는 종류이다. 


자신의 말과 행동의 모든 기준이 체면인 사람은 자신의 체면에 가족의 지분이 상당히 포함되어 있다.

체면을 중시하는 사람일수록 자신과 가족을 동일시하고, 배우자나 자식의 일을 자신의 얼굴로 인식한다. 옛날 사람이나 그러는 게 아니다. 요즘 사람도 체면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데, 그건 대부분 부모로부터 배운 것이다. 그러니까 중간에 어떤 강력한 누군가가 끊어 내지 못하면 강력한 유전처럼 대를 물린다는 소리다.


내 친구의 경우는 아버지의 체면 중시 때문에 ‘정말 돌아버릴 지경’이었다고 했다.

그 망할 놈의 체면 때문에 자식 앞에서도 남들에게 아무렇지 않게 거짓말을 하는 걸 너무 많이 보았고, 체면을 차리려다 손해를 보는 경우 또한 셀 수도 없이 보았다고 한다. 친구는 '그건 뼛속에 박힌 것이라 죽어야 끝나는 병'이라는 말까지 덧붙였다.


내 친구는 돌아버릴 지경이었기 때문에 다행히도 그걸 배우지는 않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자기보다 더 심하게 치를 떨던 동생은 체면치레하는 사람이 되었다고 한다. 특히 아이를 키우면서 더욱 체면치레 때문에 허덕인다는 거였다. 쓸데없는 돈을 쓰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아이만 죽어난다는 얘기를 들었다. 아이가 아직 어려서 엄마의 체면치레에 자신도 모르게 동참하지만, 아이가 자라면 이제 큰일이지 않겠냐고 친구는 동생과 동생의 딸 때문에 걱정이 한가득이다.


아주 극단적인 경우도 있다. 또 다른 지인은 엄마의 거짓말과 삶의 방식에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자식이 조금이라도 뒤쳐지는 것은 못 보는 엄마의 성미 때문에 어려서부터 매우 매우 시달렸는데, 급기야 엄마가 보내고 싶은 학교는 어떤 수를 써도 딸이 들어갈 방법이 없다는 걸 깨닫자마자 엄마는 자기를 (어떤 대책이나 준비도 없이 2주 만에) 외국으로 보내버렸다고 한다. 


16살에 외국에 버려진(정말 버려졌다고 밖에는 표현할 길이 없다) 자신은 그곳에서 제대로 된 학교를 다니지도 못하고 매우 방황하였는데 몇 년 후에 한국에 돌아오니, 자신은 외국에서 유명한 고등학교를 나와 이름 있는 대학을 다닌 인간이 되어 있었다는 거였다. 지인의 엄마는 자신이 뱉어놓은 말들에 부합하지 못하는 딸의 인생 따위는 상관없이 자신의 체면만 중했던 거다. (지인은 다시 외국으로 나갔다. 그곳에서는 거짓된 삶을 살지 않아도 되므로)

이 예는 매우 극단적인 경우지만, 여기저기서 이런 일들이 아예 없지는 않을 것이다. 


부모의 어떤 면을 몹시 싫어했지만, 내 친구의 동생처럼 결국 닮아버리는 경우도 많다.

오랜 시간 차곡차곡 체득한 그 경험을 떨치지 못하는 거다. 

가장 문제가 되는 행동은 배우기가 쉽다는 게 문제다.


그중 체면 중시는 정말 악질 중 악질이다.

아이의 일은 나의 체면과 직결되는 것이므로 아이에게 가장 좋은 선택에 앞서 나(의 체면)를 위한 선택을 하고 만다.

체면이 중요한 사람은 남들이 있을 때와 없을 때의 태도가 확연히 달라지는데 그걸 지속해서 보는 아이는 이미 혼돈의 세계로 빠지고 믿을 사람은 없다고 생각하며 자라게 된다.


아이의 학습이 시작되면 체면 중시는 더 악화일로에 치닫는다.

아이의 성취가 자신의 체면이기에 몹시 목매달게 된다. 자기의 성에 차지 않으면(문제는 이런 부모는 상당한 수준이어야 만족하므로 대체로 성에 차지 않는다) 훨씬 더 주위의 시선을 의식하게 되고, 그럴수록 점점 더 안 좋은 선택을 하거나 무리수를 두게 된다.


급기야는 가장 최악인 거짓말까지도 한다. 다른 사람 앞에서 아이의 성취에 대해 거짓말을 한다는 건 자기 아이의 영혼을 완전히 박살 내는 짓이라는 걸 생각하지 못한다.

자신의 체면에 눈이 멀었기 때문이다.


같은 경험이어도 누구는 떨칠 수 있고, 누구는 떨치지 못했다는 건 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지독한 경험이나 습관은 떨치기 어려운 습성이 있지만, 반드시 떨치고 가야 하는 것이 있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끊어내야 한다.


육아에서는 해야 하는 것을 하기보다 하면 안 되는 것을 안 하는 것이 중요하다. 

내가 가진 경험에서 버릴 경험을 골라내는 능력 또한 중요하다.

만일 어떤 늪에 빠진 것을 깨달았다면, 이미 늦었다는 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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