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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주 Aug 07. 2020

글쓰기에 대하여 2

간결하고 명료한 글쓰기

이번에는 스티븐 킹 작가의 '유혹하는 글쓰기'에 대하여를 읽으면서 생각한 것과 원고 편집을 한 경험 몇 가지를 써 두려 한다.

(영문 제목은 on writing이다. 유혹하는 글쓰기라는 한글 제목은 전혀 유혹이 안 되는데...)


글을 쓰면서 도움이 되었던 부분들이 있어서 적어두기로 마음먹었다.


글쓰기는 사람들마다 다 자기 스타일이 있나 보다. 정도라는 것은 없고 각자 나름의 방법을 찾아가는 모양이다.

스티븐 킹이나 무라카미 하루키 같은 경우는 소설을 쓸 때 화석을 발굴한다는 느낌으로 이야기를 발굴한다고 한다. 정해지지 않은 (결말은 작가도 모른다) 이야기를 내가 등장인물이 되어 쫓아가는 식이랄까. 진짜로 캐낸다고 말한다.

반면에 조앤 k 롤링의 경우에는 글을 쓸 때 모든 등장인물과 사건과 결말, 들어가는 이야기들을 거대한 맵 map으로 만들어 놓고 글을 쓰기 시작한다는 것을 오래전 어딘가에서 본 적이 있다. 그 많은 해리포터의 등장인물과 온갖 사건들을 미리 다 구상을 한단 말인가? 하고 엄청나게 놀랐었다.


남편의 경우는 블로그 포스팅 글이라도 먼저 구상을 하고 최소한 몇 시간이라도 머릿속에서 생각을 정리한 후에 글을 쓴다고 한다. 나의 경우는 그냥 무작정 첫 문장을 쓰기 시작한다. 어떤 글로 전개될지 나도 처음에는 모른다는 것이다. 일단 쓰면서 나의 생각을 찾아내서 끄집어내는 느낌이었달까. 그리고 나는 좀 빨리 쓰는 편이다. (그래서 고칠 것이 많다) 하다못해 나는 피아노 악보를 봐도 어떤 것이든지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무작정 양손으로 시작한다. 그러면서 차츰 완성도를 높여가는 스타일이다. 아들은 그런 나에게 본인이 배운 대로 어려운 악보는 오른손 왼손 따로 연습하고 해야 한다고 타박을 하지만....



 

원고를 쓰면서 내가 제일 통탄했던 것은 단어의 한계였다. 내가 아는 단어 양의 절대적 부족에 무릎을 꿇었다. 

유의어 사전을 좀 살펴보기도 했지만 유의어라는 것들도 50보 100보였다. 애초에 더 다른 단어를 생각해냈어야 하는 거였다.


"글쓰기에서 정말 심각한 잘못은 낱말을 화려하게 치장하려고 하는 것으로, 쉬운 낱말을 쓰면 어쩐지 좀 창피해서 굳이 어려운 낱말을 찾는 것이다."


스티븐 킹의 이 말이 나에게 한가닥 위로가 되어 주었다. 정말이지 맘이 놓였다. 

쉽게 읽히는 글이 좋은 글이라는 말은 숱하게 들었기에 알고는 있었지만 그래도 글을 쓰는 입장에서는 너무 쉬운 문장으로 쓰기는 싫은 법이지 않나. 이를테면 좀 있어 보이고 싶은 까닭이다. '나의 글은 특별해 보이지 않아!'라는 자조가 들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늘 이 말을 생각했다.

같은 맥락으로 다음과 같은 글도 있었다.


"묘사를 잘하는 비결은 명료한 관찰력과 명료한 글쓰기인데, 여기서 명료한 글쓰기란 신선한 이미지와 쉬운 말을 사용하는 것이다."


또 하나 중요한 내용으로,


"단문, 간결한 문체, 능동태 사용."


"나눠놓으면 이해하기가 훨씬 쉽다. 이렇게 하면 독자에게 편하다는 말인데, 언제나 독자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야 한다."


나의 처음 글은 나의 입장에서, 그러니까 나를 중심으로 쓴 글이었지만, 수정 작업을 하면서 독자의 입장에서 수정을 해야 했다.


2017년 가을에 두 번째 책의 출판 계약을 하고 나서 본격적인 편집 작업에 돌입했다. 출판사의 편집자는 철저하게 독자의 입장이 되어서 나의 원고를 읽어주는 사람인데, 내가 보낸 원고에 꽤 많은 질문이 달려서 돌아왔고, 나는 그 질문을 보고 답을 찾고 원고를 수정하고 때로는 질문에 답을 찾기 위해 꽤 많은 시간을 고민하였다. 가끔은 내가 이 문장을 왜 썼을까를 다시 생각해 봐야 했다.

편집자의 질문에는 납득이 되는 것도 있었고, 또 이런 것까지 다 구구절절 써야 하는 것일까? 하는 의문을 품기도 한 질문도 있었다. 왜 이게 이해가 안 된다는 거지? 짜증이 나는 대목도 있었다. 하지만 어쨌거나 독자의 궁금증을 중요하게 받아들이고 설명하자면 구구절절한 얘기를 간결한 문장으로 써야 했다.

쉼표의 유무, '~도'를 '~는'으로 한 글자만 바꾸어도 뉘앙스가 완전히 달라져서 몇 번이고 읽어보고 다시 고쳤다가 원위치시켰다가를 반복해야 했다. 그리고 그러한 한 글자는 숱하게 많았다.





초반의 수정 작업에서는 문장 쪼개기가 주 업무가 되었다. 쉼표로 연결된 문장을 나누기. 길지 않은 문장으로 만들기. 그러다 보면 쓸데없어 보여서 삭제하는 문장도 꽤 많이 생긴다. 

처음의 원고에서 수두룩한 부분을 쳐냈다. 아예 잘려나간 꼭지도 여러 개가 생겼다.

중간에 한 달 간의 인도 여행을 하고 와서 며칠 만에 다시 새로운 꼭지를 일곱 개나 썼다. 여행의 감흥이 아직 가시지 않았던 터라 먼저보다 조금 더 수월하게 썼다. 그래도 문장마다 너무 많은 삭제를 거듭하다 보니 이게 분량이 되는 걸까 하는 걱정을 하기까지 했는데 스티븐 킹의 책에는 이렇게 쓰여있다.


"수정본 = 초고 - 10%"

"적절한 삭제 작업의 효과는 즉각적이며 또한 놀라울 때가 많다."


삭제 없는 수정은 없는 것이로구나. 게다가 읽으면 읽을수록 내가 써놓은 진부한 표현에 진저리를 치는 경우도 늘어나서 나중에는 아픔 없이 척척 삭제해나갔다. 

나는 원래 비유나 꾸미는 말이 많은 글은 별로 안 좋아해서 잘 사용하지 않지만(가끔 무릎을 탁 치는 비유를 보면 경의를 표함), 그럼에도 불구하고 삭제할 어쭙잖은 비유들은 한없이 나왔다. 

스티븐 킹의 경우에는 부사를 끔찍이도 싫어하나 보다. 부사에 대해 치를 떨었다. 나의 부사 사용은 적절한가에 대한 의문이 들었다. 부사라면 나도, 나도 모르게 버릇처럼 꽤 많이 엄청나게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옥으로 가는 길은 수많은 부사들로 뒤덮여 있다.

부사를 써주지 않으면 독자들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까 봐 걱정하기 때문인데, 이런 근심이야말로 형편없는 산문의 근원이다.

부사는 민들레와 같다. 잔디밭에 한 포기가 돋아나면 제법 예쁘고 독특해 보인다. 그러나 이때 곧바로 뽑아버리지 않으면 이튿날엔 다섯 포기가 돋아나고 그다음 날엔 50포기... 그러다 보면 잔디밭은 totally, completely, profligately (철저하게, 완벽하게, 어지럽게) 민들레로 뒤덮인다."


아, 나의 부사들이 민들레 밭이 되어있으면 어쩐다!!!!!

퍽 걱정이 되었지만 그것을 모조리 뽑아내버리고 민둥산을 내보이기에는 아직 나는 창피하다.




내 원고에는 대화문들이 적잖게 나온다. 매일매일의 기록들이 우리 가족의 말을 가감 없이 담아내고 있어서 사용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일례로 나의 대화문 중에 남편을 '오빠'라고 칭하는 것에 출판사에서 다른 단어를 사용하면 어떤가에 대한 질문을 해왔다. "여보,라고 하는 것이 어떨까요?"라고 편집자가 물어왔다. 결혼 20년 차인 아내가 남편에게 '오빠'라는 호칭은 아무래도 적절하지 않다고 느꼈던가 보다. 하지만 그렇다고한들 내가 한 번도 써본 적이 없는 '여보'를 사용할 순 없는 노릇이다. '은찬 아빠~' 나 '저기요'는 말할 필요도 없고. 

내 말투가 아닌 것, 내 생각이 아닌 것, 아이의 말이 아닌 것, 조금 좋아 보이게 가공하여 꾸며낸 에피소드를 에세이에 담을 수는 없다. 그것은 나의 확고한 입장이었고, 

결국 '오빠'로 결론이 나긴 했다.


"좋은 대화문의 비결은 진실이다. 사실적이고 공감을 주는 대화문을 쓰려면 '반드시'진실을 말해야 한다."


스티븐 킹이 굉장히 강조한 것이다.

반드시 진실을 말해야 한다. 대화문이라면 진실되게.

'에이 썅! 겁나 아파!'를, '어머나 아파라~'로 쓰면 안 되는 것이다.




내내 컴퓨터로 원고를 수정하다가 막바지가 되자, 출판사에서 프린트를 해서 보내주었다. 활자화된 원고를 보며 다시 수정하는 작업을 했다. 정말이지 컴퓨터로 30번은 넘게 읽으며 수정을 했기 때문에 더 이상은 수정할 것은 없으리라, 혹시 못 본 오자만 잡아내면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면서 읽어 나갔다. 


그 당시 출판사에서 건네준 프린트한 원고



하지만 웬걸. 수정할 것은 숱하게 나왔다. 

아직도냐? 소리 지를 만큼 더 바꿀 것들이 보였다.



더는 없겠지 하고 다시 처음부터 읽었는데, 놓친 것들이 다시 보였고, 이렇게 고치는 것이 더 나을까? 수없이 물음에 답해야 했다.

애초에 내가 열 번 넘게 수정한 원고를 보냈건만, 다시 고치고. 고치고. 고쳤다. 

그래서 마지막이라며 네 번째 프린트를 해서 보내준 원고는 완벽은 아니어도 고칠 것은 거의 없겠지, 했지만 역시나 나는 울음을 삼키며 수십 개의 포스트잇을 붙여야 했다.


이건 스티븐 킹의 책, 유혹하는 글쓰기의 한 부분으로, 원고 수정을 보여주는 페이지이다.


김연수 작가와 마찬가지로 스티븐 킹도 '전업작가라는 사람의 초고도 얼마나 한심한가'에 대해 말했다.

유명 작가라도 누구나 초고는 그런 거군요.

나도 스무 번, 서른 번을 고쳐서 조금 더 간결한 문장으로 다듬고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의문을 품지 않도록 하겠다고 다짐했다. 


스티븐 킹의 말 중에 가장 임팩트가 있던 말은 바로 이것이다.


"편집자는 언제나 옳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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