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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먹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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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주 Oct 30. 2020

토란을 키워 먹는 일

5월 8일부터 10월 28일까지의 여정

우리 집에는 꽤 많은 식물들이 거실과 방, 옥상 할 것 없이 놓여있다.

베란다가 따로 없는 집이라서 주로 거실에 잔뜩 늘어놓았지만, 동쪽 창이 크게 있는 아이 방에도 오전 내내 햇빛이 대단해서 자리 차지를 많이 하는 식물들을 좀 가져다 놓았다. 

무엇보다 옥상이 있어서 바람과 비와 해와 일교차와 추위가 필요한 각종 나무와 어마어마한 광량이 필요한 식물을 키울 수 있다. 먹을 수 있는 채소류를 키우기에도 좋다. 말하자면 옥상 화분 텃밭이다.


옥상 텃밭의 메인 테마는 허브다. 고추는 매번 망하고, 토마토도 그러하다.

고추에는 뭔 벌레가 그렇게 생기는지, 또 토마토는 옥상의 열기 때문에 열매가 죄 터져 버리기 일쑤여서 포기했다. 

내가 이만큼이나 노력을 들였는데, 얻을 수 있는 게 고작 요만큼의 고추와 토마토란 말인가! 허구한 날 벌레 잡고 지지대 세우고 장마와 혹서기와 태풍에 이리 뛰고 저리 뛴 것의 대가는 요만큼도 없고, 초기 비용인 흙 값과 모종값으로 고추와 토마토를 사도 이보단 나을 판이니. 

그래서 이제는 아이가 사족을 못쓰는 바질과 내가 사족을 못쓰는 고수와 루꼴라 정도를 잔뜩 키워 먹는다. 때때로 쌈채소도 키워 먹는다.


옥상의 화분에 각종 작물들을 심어 먹으면서도 토란을 키울 생각은 못했다. 아마도 토란의 무지막지한 성장을 알기 때문이었을 게다. 어릴 때의 기억으로 토란 같은 건 땅에서 자라야 마땅한 것이라고 여겼다.


트위터의 식물 친구들이 블랙매직이나 점박이 모히토, 산토소마 등등 멋쟁이 콜로카시아를 화분에서 키우는 걸 보면서도 엄두를 못 냈다. 저 코끼리 귀 같은 큰 잎을 키우고 싶다고 열망하면서도 말이다. 지금 몬스터처럼 자라고 있는 몬스테라도 어찌할 바를 모르겠는 좁은 실내에서 저렇게 빨리, 크게 자라는 콜로카시아까지 감당할 수 없으니까.


그러던 올봄, 시장에 나가는 길에 토란을 만났다. 

각종 모종과 화초를 조금씩 가져다 놓고 파는 '길가'가 있는데 그 길가가 그 할머니의 자리가 된 지는 꽤 오래되었다. 오며 가며 습관처럼 화초를 보는 그곳에서 너무너무 귀여운 무광 잎의 아기 토란을 발견했다. 아아.... 너무 귀여워!

'그래, 토란이라면 키우는 기쁨은 한껏 느끼고 겨울이 되기 전에 저절로 시들 테니까 공간 걱정이 없을 거야.'


5월 8일. 한주먹만 한 아기 토란. 천 원.


직전에 나온 줄기에서 새 잎이 비어져 나온다. 나오자마자 돌돌 말려있는 잎을 며칠 만에 펼친다. 


데려온 날 적당히 큰 화분으로 옮겨주었다. 


나도 이제 코끼리 귀 있어! 이토록 작고 귀여운 토란의 무광 잎


토란은 하루가 다르게 자랐다. 자고 일어나면 큰 게 보였다. 

나는 어렸을 때 마당의 화단 한쪽에 심어져 있는 토란을 매우 좋아했다. 매일매일 놀기도 바쁜 어린 눈에도 토란의 성장은 대단한 것이었다. 화단에 들어가서 토란잎 아래 앉아 있으면 세상 안전한 아지트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한 여름에도 그곳에서는 더위가 견딜만했고, 비라도 내린 날이면 토란잎에 고인 보석같이 예쁜 물방울을 쪼개고 다시 합치면서 한참이나 놀았다. 

잎을 아무리 흔들어도 두꺼운 토란대는 지팡이처럼 단단했고, 아무리 만져대도 커다란 토란잎의 보드라운 감촉은 이불가게에서나 만져보는 새 담요의 느낌이었다.


1980년. 토란잎 아래 앉아있는 일곱 살의 나.


젖은 손을 토란잎에 털면 물방울들이 유리구슬처럼 타다닥 소리까지 내면서 동그랗게 떨어져 가운데로 모여 하나가 되는 모습은 질리지도 않았다. 

'내 아이도 토란잎에서 춤추는 예쁜 물방울을 볼 수 있겠구나, 진작 키워볼 걸 그랬네.'



5월 30일. 두 번째 분갈이.


얼마나 폭풍 성장을 하려고 그러는지, 한 달도 안 되어서 원래 화분보다 몇 배나 큰 화분으로 분갈이를 해주어야 했다. 원래 화분 밑으로 뿌리가 비집고 나왔기 때문이다. 흙 잡아먹는 귀신이네! 


6월 14일. 압착되어 있는 새 잎이 줄기를 가르고 비어져 나오고 있다. 


이런 방식으로 새 잎을 내는 식물을 여럿 키우고 있지만, 이 방식은 볼 때마다 신기하다. 줄기가 나온 지 얼마나 되었다고, 다시 그 줄기에서 새잎을 이렇게 뚝딱 만들어 내냔 말이지. 

여기서 핵심은 새 잎도 이미 다 준비가 된 채로 돌돌 말려 있다는 거다. 이 완벽한 잎을 어떻게 뚝딱뚝딱 만들어 내는 거냐고! 

"식물은 정말 대단해!"

식물을 키우면서 내가 아이에게 가장 자주 하는 얘기다. 

"우와, 어떻게 여기서 이렇게 나오냐고?"

아이도 매번 감탄해준다. 


6월 17일. 아이고, 이렇게 작은 자구가 옆에서 삐져나오네!


6월 25일. 일주일 새에 자구가 이렇게 늘었다. 가운데 돌돌 말린 새잎은 줄기에서 튀어나온 모양이 잘 보인다.  


아기 잎에는 빗물이 가득 고여있다. 


너무 예뻐! 물방울 속에 들여다보는 아이 머리가 슬쩍 비친다. 


비를 맞은 토란에 물방울이 맺혀 있는 것을 보고 소리를 질렀다. 

"은찬아, 얼른 올라와 봐! 끝내주는 게 있어!"

아이는 물방울이 어떻게 이렇게 되는 거냐면서 함께 감탄을 해주었다. 

"잎을 탁탁 건드리면 물방울이 몇 개로 쪼개졌다가 다시 합쳐진다?"

아이는 몇 번 해보며 감탄하다가 잎을 계속 치는 것이 맘에 걸리는지 그냥 합쳐진 물방울을 이리저리 움직이면서 논다. 

물이 묻지 않는 잎이 물을 얼마나 예쁘게 담는지 아이도 잘 보았겠지.


이미 중학생이 된 아이라 그런지 어린 시절의 나처럼 열광하며 놀지는 않았지만, 옥상에 올라올 때마다 토란의 성장에 놀라고 물방울을 떨어뜨려 보았다. 그러다가 계속 키우면 안 되냐고, 토란이 죽는데 꼭 구근을 캐야 하냐고 안타까워 하기 시작했다.  


7월 5일. 한 달 보름 만에 세 번째 분갈이를 또 해야 했다. 


우리 집에서 제일 크고 깊은 고무화분에 쏙!


7월 18일. 분갈이하고 나서 폭풍 성장하고 있는 게 눈에 보인다. 


7월 25일. 토란, 사랑해. 


이런 대단한 성장을 매일매일 보고 있으면 정말 놀랍다. 

아침 다르고 저녁 다르다. 

매 순간 최선을 다해서 성장을 하고 있는 토란을 보면 장하면서도 너무 애쓰는 것 같아 짠한 생각이 든다. 아이 말처럼 이런 애를 어떻게 죽이겠나 싶은 생각이 점점 커진다. 

'계속 키워야 하나?' 

월동을 못 시킬 것을 뻔히 알면서도 이런 생각이 든다. 


8월 5일. 비를 한껏 맞은 토란의 성장.


올해 여름에는 줄기차게 비가 왔다. 특히 8월에는 내내 비가 내려서 햇빛 보기가 힘들었다. 

옥상의 식물들이 한 달 내내 젖어있었다. 화분들을 골라서 처마 밑으로 옮겨놓거나 들여놓기도 했지만 거의 수중 속에서 사는 셈이었다. 물을 좋아하는 토란은 이렇게 신났지만. 

어쩌다 비가 멎고 여름 해가 나오면 햇빛에 적응하지 못하고 나온 새 잎들은 속절없이 햇빛에 타서 갈색이 되기도 했다. 


8월 18일. 땅에서 자랐으면 얼마나 좋았겠니. 


8월 25일. 두 번의 태풍이 지나갔다. 찢기고 부러진 잎을 잘라내어 한산해졌다. 


태풍도 대단한 여름이었다.

태풍 소식이 있을 때마다 커다란 토란과 허브화분을 제외한 모든 옥상 식물을 들였다가 내놨다가를 반복해야 했다. 허브화분 위에는 의자를 얹어 놓아서 비바람을 조금 막을 수 있었지만 커다란 토란은 대책이 없었다. 


아이는 태풍 소식을 들을 때마다 매번 "엄마, 화분 다 들여놨지?"라고 물었다. 그러고선 "토란도?"라고 꼭 다시 묻는다. 

"그건 들여놓을 데가 없어." 나는 매정해 보이는 목소리로 매번 이렇게 말한다. 아이가 어떻게든 들여놓자고 나를 설득시킬 것이 무서워서 어림도 없다는 목소리로 차갑게 말한다. 


그래도 걱정스러운 마음에 바람 때문에 잘 열리지 않는 옥상 문을 빼꼼히 열어 구석에 붙여놓은 토란 화분을 몇 번이나 확인했다. 모진 비바람을 고스란히 맞으면서 사정없이 펄럭거리는 토란이 보였다. 비닐로 감싸 놓은 건 이미 엉망이 되어 큰 잎들이 이리 찢기고 저리 찢기고 난리도 아니었다. 

내 새끼가 혼자 모진 일을 당하는 걸 보는 것처럼 맘이 안 좋았다. 


태풍이 올 때마다 남편에게 이렇게 말했다. 

"난 옥상에 화분 몇 개뿐인데도 태풍이 오면 돌겠는데, 농사짓는 사람들은 어떡해?"

뉴스에서는 태풍이 올 때 물길을 살피거나 시설물을 점검하러 나가지 말라고 연신 당부를 하지만, 그 비바람을 뚫고 나가는 그들의 마음을 나는 짐작한다. 태풍에 피해를 입은 농민들의 인터뷰를 볼 때마다 나는 화분 하나만 엎어져도 이렇게 속상한데 오죽하실까 싶어서 눈물이 팽 도는 것이다. 


태풍은 어김없이 지나간다. 

밤새 바람소리에 잠을 설치고 아침이 되어 잠잠해진 하늘을 보자마자 옥상에 뛰어 올라갔다. 아이가 볼세라 몇 갈래로 찢겨 너덜너덜해진 잎들과 부러진 토란대를 잘라냈다. 숱이 퍽 줄었지만 이만하면 잘 버텼다고 토란을 바라본다. 

크고 단단한 잎과 줄기일수록 타격이 심하다는 것이 아이러니다. 


10월 21일. 낮은 온도에 시들어버리는 토란.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되었다. 

최저 온도가 낮아지면서 토란은 새 잎을 내는 일을 겨우 겨우 해내는 것처럼 보였다. 새잎을 내기까지의 시간도 꽤 오래 걸렸고, 매번 더 큰 잎을 내던 토란은 이제 매번 작은 사이즈의 잎을 냈다. 20도 밑의 온도에서는 성장이 멈춘다는 토란. 시든 잎을 하나둘씩 자르다 보니 이런 상태가 되었다.


구근은 서리가 내리기 전에만 캐면 된다고 했다. 

토란대가 정말 맛있다고 말려보라는 부모님의 말씀은 따르지 못했다. 그냥 시들 때까지 기다렸다가 하나씩 잘라냈기 때문에 나에게는 싱싱한 토란대가 없었다. 

어쨌든 더 추워지기 전에 캐기로 했다. 월동해야 하는 나무도 이 토란 화분으로 옮겨 심어야 해서 최저기온이 더 떨어지기 전에 서둘렀다.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서 남편과 아들을 불렀다.


그 큰 화분 가득 뿌리가 차있었다. 


토란 구근을 찾기 시작. 


수확한 토란은 이만큼!!!!!  


토란은 물돼지인데, 가을에 몇 번 물을 바싹 말렸던 게 후회되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더 많은 구근이 생기고 더 크게 자라 있었을 텐데 싶었다. 

하지만 세 식구가 먹기에 충분히 많은 양이다.


10월 28일. 그늘에서 일주일 말린 토란을 삶아 토란국을 끓이는 날이다. 


소고기를 잔뜩 넣고 무를 나박나박 썰어서 끓이기 시작했다. 

토란은 따로 삶아내어 껍질을 까야한다. 쌀뜨물이나 우유를 좀 넣고 삶으면 껍질이 잘 까진다고 해서 우유를 조금 넣은 물에 삶았다. 


삶아서 껍질을 깐 토란


어떤 것은 훌러덩 잘 까졌고, 어떤 것은 칼로 껍질을 벗겨내야 했다. 우유 덕분이라고 하기엔 미진했지만, 토란 껍질을 벗기는 동안 소고기와 무는 달달 끓여졌다.

껍질을 벗겨낸 토란을 넣고 다시 푹 끓였다.


맛있는 토란국.


세 식구가 먹을 국을 차례로 푸면서, 내가 먹을 국에는 토란을 집약적으로 담았다. 

이렇게 토란이 가득 들어있는 토란국을 먹다니!! 그것도 내가 키웠다고!! 

트위터 식물 친구들에게 보여주려고 사진도 찍어 올리고, 엄마에게도 전송하고 친구에게도 자랑했다. 

트친들은 하트를 찍어주고 멘션을 남겨주었고, 엄마는 맛있게 잘 끓였다고 맛나게 먹으라고 하셨다. 

친구는 이젠 별 걸 다 키워서 먹는다고 했다. 


얼마나 맛있는지, 입천장이 까지는 줄도 모르고 세 그릇이나 먹었다.


나야 말할 것도 없고, 남편도 진짜 맛있다는 말을 연발하면서 먹었다.


아들 녀석에게는 작고 동그란 예쁜 토란으로만 골라서 담아 주었는데, 토란을 몇 개 건져 먹더니 이렇게 말했다.

"엄마 근데 식감이 좀... 나 토란은 좀 그래."

"아싸, 그럼 토란은 다 엄마 차지!!" 


아들의 국그릇에서 토란을 건져 가면서 보니까 토란이 자기 입에 별로라는 사실이, 심지어 우리 토란인데 별로라는 게 편치 않은 눈치다. 


"괜찮아. 토란 싫을 수도 있어. 식감 때문에 토란 안 좋아하는 사람 많아. 근데 싫어했던 음식도 나중에 시간이 지나면 되게 맛있어지는 경우가 아주 많거든. 엄마도 그런 거 몇 개나 있어. 그러니까 시간 지나면 한 번씩 다시 시도해 봐야 돼. 맛있어진 줄 모르고 계속 싫어하는 거라고 안 먹으면 억울하니까."


내년에도 우리 가족은 아기 토란의 성장의 감탄하면서 지켜볼 것이다.

그리고 찬바람이 부는 날에 토란을 캐내고 시간을 들여 토란국을 끓이고, 이마에 땀을 흘리면서 맛있게 먹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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