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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이 Aug 23. 2020

부부의 끝

딩크 라이프, 내일은 어떨까

  은행에 다녀온다던 아내가 락앤락 통을 잔뜩 들고 돌아왔다. 어찌 된 영문인지 아내에게 물었다.

  “갑자기 왠 락앤락이야?”

  “내가 오늘 오빠를 위한 예금을 하나 들었어. 나중에 내가 죽게 되면 그 돈이 오빠한테 유산으로 가는 상품이래. 가입하면 락앤락 세트 준다길레 받아왔지.”

  “그런 게 다 있어? 그래서 얼마를 넣었는데?”

  “삼만 원. 삼만 원이 최소 금액이래. 내가 그 정도는 오빠한테 남겨줄 수 있지.”


  고작 삼만 원이 뭐니, 삼만 원이! 오빠는 나한테 만원이라도 남겨줄 거 있어?! 이런 시답잖은 이야기들로 티격태격하다가 어느새 우린 먼 훗날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언젠가는 우리 부부에게도 끝이 있겠지? 아무리 사이좋은 부부로 행복하게 평생을 산다고 해도, 결국은 죽음이라는 어찌할 수 없는 이별의 순간을 맞이하게 될 것이었다. 게다가 우리에게는 자식도 없다. 한 사람이 먼저 세상을 떠나게 된다면 남겨진 사람은 얼마나 슬프고 막막할까. 정말 이런 이유 때문에라도 부부에게는 아이가 있어야 하는 걸까?


  며칠 뒤 친한 친구와 함께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그 이야기가 다시 나왔다. 그 친구는 아직 결혼도 하지 않았고 지금 만나는 사람도 없어서, 이러다 평생 혼자 살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다고 했다. 그러다 보니 우리와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었다. 내가 늙으면 누가 날 돌봐줄까, 누가 나의 죽음을 지켜봐 줄까, 이런 고민들 말이다. 친구는 우리 부부의 이야기에 격한 공감을 보내더니 뜻밖의 해답을 내놓았다. 


  “그래서 나는 모든 연금과 적금의 만기를 딱 육십 살까지로 맞춰놨어. 그리고 팔십 살까지 연금을 수령하는 걸로. 육십까지 어떻게든 돈을 벌고 팔십까지는 조금 편하게 살고 싶어서.”

  “그럼 팔십 살 이후에는 어떡하게?”

  “그래서 내가 고민을 해봤는데... 팔십이 되면 안락사를 할까 해. 지금도 돈만 있으면 스위스 같은 나라에 가서 안락사할 수 있대.”


  뭐라고? 안락사? 처음에는 어이가 없었지만 듣다 보니 묘하게 설득력이 있었다. 한 사람이 먼저 떠나는 모습을 볼 바에야, 팔십까지 행복하게 살다가 같이 손 꼭 잡고 눈감는 것도 나름 아름다운 부부의 끝 아닐까? 친구도 혼자 죽기엔 외로우니까 셋이 같이 가면 안 되겠느냐고 부탁했다. 그래, 그럼 우리 다 같이 팔십 살에 스위스 가자! 지금부터 적금 들자! 그 순간 아내가 반문했다.

  “난 반대야. 오빠들 팔십 살이면 나는 칠십 일곱 살이잖아. 칠십 대에 죽는 건 너무 이르단 말이야!”

결국 내가 한 발짝 양보했다. 내가 팔십 세 살에, 아내가 팔십 살에 스위스에 가는 것으로.


  물론 아직 사십 년도 족히 더 남은 먼 훗날의 일이다. 그때 가서 우리의 생각이 어떻게 바뀔지, 혹은 여전히 같을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 어쩌면 죽음을 아직 나와는 먼, 추상적인 어떤 것으로만 여기는 삼십 대의 우리니까 할 수 있는 상상일지 모른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우리는 죽음을 상상함으로써 지금의 삶에 대한 어떤 의미들을 찾게 된다는 것. 죽음은 늘 우리 가까이에 있다. 팔십 살이 아니라 당장 내일 죽음이 우리를 찾아올지도 모른다. 죽음을 떠올리며 우리는 지금 이 모든 순간들을 허투루 보내서는 안 된다는 다짐을 하곤 한다. 


죽음의 여신 앞에서 춤을 추는 것이
인생.
찰스 부코스키, <망할 놈의 예술을 한답시고>, 민음사


  식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아내가 내 손을 꼭 잡고 말했다. 

  “오빠, 그니까 건강 좀 챙겨. 술도 좀 줄이고. 나보다 먼저 죽으면 절대 안 돼.”

  “왜, 오빠 없이는 못 살 것 같아?”

  “아니, 나 심심해서. 나 친구 없는 거 알잖아.”


  우리는 말없이 걸었다. 밤공기가 선선했다. 이 순간을 오래도록 기억하고 싶었다. 여름이 끝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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