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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주 Jan 22. 2024

실패에 실을 감고 풀며 마음껏 연을 날리자

걸음 열 ; 얼음, 눈, 바다에 담긴 마음 예보

아이가 정기구독하는 잡지의 연말호를 뒤적이다 하나의 문장에 강렬하게 꽂혀버렸다.


"실패를 자랑해 봐!"


뭐라고? 자랑할 게 없어서 그걸 자랑하라고? 어린이 구독자를 타깃으로 하는 잡지에서 왜 그런 타이틀을 썼을지 조금은 뻔하고 얼추 추측도 되었지만 어쩐지 눈을 뗄 수 없었고 (내심 반성과 다짐을 기대하며) 진지하게 읽어 내려갔다. 


'부족했다. 뒤처졌다. 망했다. 부끄럽다.'


흔히 '실패'와 연관 지어 떠올리곤 하는 말들! 그런데 이건 아이들만 쓰는 말이었던가. 나 역시 얼마나 숱하게 써왔던가. 일이 제대로 안 풀린다고 나를 부족한 사람이라며 탓했고 주변에 잘나가는 사람들을 보면 나만 뒤처졌다 싶어 한숨지었다. 나름 최선을 다해 열심히 했는데 결과가 내 예상과 전혀 다를 때면 인생 자체가 그냥 망한 것 같았으며 감정이 가라앉은 후에 찬찬히 기억을 들춰보면 부끄러운 자국이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계절이 추우니 마음도 으스스하다. 그러나 춥다고 해서 꼼짝없이 웅크려 있을 순 없다. 밖으로 나가 겨울의 한기를 느껴보고 겨울이라서 할 수 있는 일을 해본다. 어릴 적 생각하면서 요리조리 씽씽 쌩쌩 얼음 썰매를 지치고 언덕배기 위에 올라가 하늘을 날듯이 눈썰매로 질주한다. 정신없이 노느라 꽁꽁 얼어붙은 손과 발은 활활 타오르는 장작불에 노곤노곤하게 녹인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코코아까지 홀홀 마시면 겨울은 추워서 싫은 계절이 아니라 춥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계절이 된다. 


겨울의 얼음과 눈에 투영된 마음 예보는 실패에 맞서는 우리의 자세와 상통한다. 다른 시각으로 받아들이기!


'부족했다. 뒤처졌다. 망했다. 부끄럽다.' 대신 '느꼈다. 배웠다. 발견했다. 성장했다.'로 바꿔본다. 주눅이 들어 자책하고 회피하거나 단념하며 덮어두는 것이 아니라 너그럽게 이해하고 당당하게 내세워 스스로 발전하는 구름판으로 삼는다. 실패한 나를 있는 그대로 느끼며 포용하고 하나를 더 배웠음에 가치를 둔다. 이전에는 몰랐던 사실을 발견했기에 어제와 다른 나로 성장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면 실패는 후회가 아니라 자랑이 된다. 생각은 동전의 양면이자 종이 한 장의 차이였다.



책에는 KAIST에 대한 기사도 다루고 있었다. 똑똑하고 완벽한 자들만 모여 있을 것 같은 학교에 '실패 연구소'라는 기관이 있다. 그곳은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도전 정신을 길러주기 위해 학생들의 실패 사례를 수집하고 분석한다. 지난해 하반기에는 '실패 주간'을 열어 다채로운 행사를 펼치기도 했다. 실패에 대한 압박감을 자랑으로 삼는 계기로 만들자는 취지에 많은 학생들이 참여해 학업, 건강관리, 연애, 진로 등 다양한 분야에서의 실패 경험담을 '마음껏' 자랑했다.


실패는 전적으로 '개인적'이며 '비밀스러운' 것이라고 생각했던 나는 실패를 감추느라 바빴고 실패를 거듭하는 모습을 지우는데 급급했다. 실패란 당장 내다 버려야 할 쓰레기였고 용납할 수 없는 블랙리스트였다. 성취하고 인정받고 보람을 얻는 것을 우선순위로 살던 나에게 '자랑할 수 있는 실패'가 큰 공명을 일으켰다.



육지의 끝이자 바다의 시작에 서서 나는 생각했다. 여름의 바다만이 바다의 매력이 아니었다고. 모진 바람과 외로운 파도가 넘실대는 겨울의 바다에는 뜨거운 각성과 순수한 도도함이 있었다. 고통이나 고독마저 인간의 진실한 감정이듯 실패와 좌절은 인간이 가진 가능성의 일부였다. 드넓은 수평선에 머물던 나의 시야에는 바위에 부딪혀 산산이 부서지는 물거품, 이름 모를 조가비, 별 쓸모없어 보이는 바다풀이 아른거린다. 


나는 아주 천천히 양손을 교차해서 어깨에 얹고 스스로를 안아주는 날갯짓으로 토닥토닥 '나비포옹'을 한다. 실패의 경험 속에 위축되어 살아온 마음을 살살 달랜다. '아니야 아니야, 실패는 나쁜 경험이 아니었어. 그건 진정한 나를 찾아가는 소중한 시간이야.'



이제 아무리 넘어져도 무르팍에 묻은 흙을 툭툭 털고 일어날 수 있다. 짠 바닷물에 바짓단 좀 젖었다고 성화를 부리지 않겠다. 잠깐의 박수갈채는 성공이 아니었다. 누구를 주목하고 누군가의 관심을 받는다는 건 서로가 서로에게 애정을 가지고 주의 깊게 살피는 올곧은 시선과 그로 인해 생기는 도저한 의식에서 비롯된다. 무수한 실패를 온전히 내 것으로 만들며 함께 어우러져 손뼉 치자. 


실패에 실을 감았다가 언제 풀어야 할지 바람의 흐름을 잘 파악해야 하늘 높이 연을 띄울 수 있다. 달리다가 넘어지는 건 예사로 일어나는 일이지만 창피함을 무릅쓰고 일어나 앞을 보며 묵묵히 달려야 삶의 빛나는 피니쉬 라인을 뜨거운 가슴으로 안을 수 있다.



겨울이 예보하는 반가운 마음가짐은 또 있었다. 묵은해를 정리하고 희망찬 새해를 맞을 수 있다는 것, 멀지 않아 따뜻한 봄이 찾아온다는 점. 곧 작별해야 할 겨울이니까 지금의 계절을 만끽한다. 아낌없이 즐기기, 그리고 올 한 해 잘 살기.  


품이 큰 겨울 바닷가에 서서 하염없는 사색에 젖다 보면 이제 다시 시작해 볼까 하는 마음이 절로 우러나온다. 이 겨울을 단단하게 살뜰히 갈무리하고 봄을 맞으러 나서야겠다.



ps. BGM


긴긴 이 겨울도 그저 잠시일 뿐이니 
봄이 돌아오겠지 매해 그랬던 것처럼
이제 다 알 수 있지만 너무 외로운 나이니 
욕심부린 것 같아 감싸 안아줬으면 해

* 제주소년 《잠시 스쳐갈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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