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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주 Jan 29. 2024

시장에 가면 뭐가 좋지?

걸음 열하나 ; 어린이와 어른이의 추억 천국

초등학교 다닐 때 집에서 10분 정도 언덕배기를 걸어내려가면 시장이 있었다. 5거리와 버스 정류장을 끼고 주택가 안쪽 두 갈래 골목길에 고기, 생선, 채소, 과일, 떡 등 온갖 것을 파는 가게와 좌판이 복작복작 이어져 있었다. 나는 슈퍼집 딸내미니까 우리 집에서 파는 과자나 음료수를 내 마음대로 먹을 수 있었지만 집에 쌓여 있는 건 거들떠도 안 보는 놀부 심보를 가졌는지 나는 다양한 군것질거리가 지천으로 깔린 시장에 가는 걸 무척이나 즐겼다.


장마철이 되어 비가 억수같이 내릴 때는 김이 무럭무럭 나는 찜통에서 갓 쪄낸 뜨거운 옥수수를 하모니카 불듯 들고 아귀아귀 갉아먹었다. 아프고 입맛이 없어서 아무것도 못 먹은 채 누워 있을 때 엄마가 시장에 간 길에 사다준 순대를 소금에 꼭꼭 찍어 한 줄을 다 먹으면 금세 기운이 돌아오곤 했다. 금방 튀겨낸 어묵은 왜 그렇게 맛있는지 나무젓가락에 꽂아주면 세 개는 순싹, 동글동글 귀여운 찹쌀 도넛과 작은 소시지가 숨어있는 핫도그는 설탕 범벅으로 먹었고, 새빨간 떡볶이를 간장에 찍어 먹기도 했다. 심부름 가는 걸 싫어하고 사람 많은 곳도 질색했지만 장 보러 가는 엄마는 꼭 따라나섰는데 먹을거리들이 한가득 펼쳐져 있는 시장 풍경이 어린 나를 유혹했던 것 같다.


시장통 뷔페, 특히 통인시장은 기름 떡볶이를 먹어줘야 해


어른이 되고 아이들을 키우게 되자 물건들이 깔끔하게 진열되어 있고 통행이 쉬우며 깨끗한 대형마트에 더 익숙해졌다. 시장은 가까이에 있지도 않아 일부러 찾아가야 되는 장소가 되었지만 시장이 가진 간질간질한 추억과 몽글몽글한 향수는 내 마음속에 아직 그대로였다. 그랬기에 서울 나들이를 나서며 가고 싶었던 시장부터 찜한 건 당연한 일이었다.


경복궁역 통인시장


통인시장은 어릴 적 동네 시장처럼 골목형 재래시장이고 나름 역사가 있었다. 1941년 일제강점기에 효자동 인근 일본인들을 위해 설립된 공설시장으로 6.25 전쟁 이후 서촌 지역의 인구가 증가하자 소비공간의 필요로 노점과 상점들이 형성되면서 제대로 된 시장의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일반 시장과 비슷하지만 카페, 식당을 비롯해 특히 반찬가게가 많이 분포되어 있다. 2005년에 현대화 시설을 갖춘 후 2010년 서울형 문화시장으로 선정되었다. 


엽전 개당 500원, 드라마나 영화에서 보던 엽전이 마냥 신기하다


통인시장의 큰 특징은 2012년 1월부터 운영하기 시작한 '도시락카페 통(通)'이다. 개당 500원인 엽전을 미리 구입해 기름떡볶이, 꼬마김밥, 닭꼬치, 만두, 국수, 컵밥, 전이나 잡채 같은 반찬들, 조각 과일, 식혜나 주스 등 맛있는 음식을 다양하게 골라 사 먹을 수 있는 색다른 즐거움을 주는 시장이었다. 


1인당 만원치 엽전을 구입해 일회용 도시락통을 들고 마치 뷔페식당에 온 마냥 이곳저곳 기웃기웃 구경을 하고 각자 취향껏 먹을 걸 담은 후에 따로 마련된 카페에 가서 먹으면 된다. 밥과 국도 엽전으로 구입 가능하며 남은 엽전은 환불받거나 간단한 기념품 구입도 가능했다.


이것도 먹고 싶고 저것도 먹고 싶고 양을 적게 준다 싶어도 도시락에 꽉 차면 꽤 양이 많다


종로5가역 광장시장


조선 시대 한양의 3대 시장은 종로 일대 시전과 서소문 일대의 칠패시장, 흥인지문 일대의 배오개시장이었다.

개항 이후 몰려드는 중국, 일본 상인들에게 대응하기 위해 1905년 배오개시장이 있던 곳에 한인들이 자본을 모아 광장주식회사를 설립했고 그 후 광장주식회사가 운영하는 동대문 시장은 일제강점기 때 남대문 시장과 더불어 서울의 대표 시장이 된다. 한국 전쟁 이후 1960년대 초에 동대문시장의 규모가 커지면서 시장이 분리되어 현재의 광장시장 형태로 자리 잡았다.


정말 다양한 국적의 외국인을 만날 수 있는 광장시장


시장 바로 앞 청계천에 여러 개의 다리가 있었는데 회사가 광교와 장교 사이에 있다는 의미에서 광장시장이란 이름이 유래했다고 한다. 이처럼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오랜 전통을 가진 시장인 데다가 먹자 노점이 즐비해 내, 외국인들로 바글바글 북새통이었다.


결혼하기 전에 한복을 맞추러 왔을 땐 포목과 주단 점포들로 유명한 줄 알았는데 육회, 빈대떡, 마약김밥, 만두, 잔치국수, 순대, 떡볶이 등 먹거리 골목으로 이제 유명세를 타고 전 세계 관광객들을 끌어모으고 있었던 것이다.


인파에 떠밀려 아슬아슬 자리를 맡았고 사람들 사이에 껴서 겨우 주문 완료! 특별히 맛있다기보단 왁자지껄한 시장통 분위기가 한몫 단단히 거들었다. 잇속 밝은 장사치들의 정은 옛날 같지 않아 친절이나 청결을 기대하긴 어렵겠지만 사람 사는 맛에 흠뻑 빠져볼 수 있는 전통시장이 아닐까 싶다.


이곳에 가면 마약김밥과 빈대떡을 먹어야 한다


숨 돌릴 새도 없이 바쁘게 일하시는 분들, 화장실 갈 틈이나 있을까, 식사는 언제 하실까, 다른 사람이 보면 나도 저렇게 열심히 살고 있는 걸까. 입은 반사적으로 씹으며 오도카니 생각에 빠져든다. 


계획을 세우고 바쁘게 사는 것이 나는 좋았다. 그건 열정적으로 살고 있다는 증거였고 시간이 흘러 나 자신을 돌아보면 후회하지 않을 보람을 안겨주리라 믿었다.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 생기면 불안하고 일에 차질이 생길까 봐 전전긍긍했다. 시간을 헛되이 보내고 있으면 어쩌나 종종걸음 치기도 했다. 


그런데 시장통 한가운데 앉아 정신없이 돌아가는 주변을 바라보고 있자니 문득 현기증이 났다. 시장은 생동감이 흘러넘쳤고 삶의 활력으로 북적대고 있었지만 이건 너무 치열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꿈틀거렸다. 그동안 먹고살기 위해 부지런히 달려왔지만 어쩌면 하루하루 살기에만 급급했던 건 아닐까 하는 자각. 


우리의 시장이 잃어서는 안 되는 건 삶의 생기와 인간의 정, 오늘은 또 어떤 손님이 얼마나 많이 찾아올까 두근대는 기대감일 거라고 생각한다. 나는 종로의 두 시장에서 얻은 생기, 정, 기대감을 안고 여전히 바쁘면서도 여유로울 열심과 심심의 중간을 잘 디뎌야겠다며 발길을 돌렸다.


자리쟁탈전이 치열해 서서 먹고 걸으면서 먹고. 그것도 나름 재미있었던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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