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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주 Feb 12. 2024

2월의 눈을 밟아 겨울곰처럼 행복하게 머물렀지

걸음 열셋 ; 낭만 책방에서 읽고 쓰고 음악과 풍경에 젖다


눈을 감으면 지금도 선하다. 열일곱이 된 소녀는 고등학교 입학을 앞둔 그 겨울 내내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다. 어둡고 작은 방안에는 귤과 라디오, 책이 뒹군다. 하루종일, 매일매일 귤을 까먹으며 소녀는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DJ의 목소리와 음악에 귀를 기울인다. 그 밖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오직 책을 읽거나 친구에게 손 편지를 쓰거나 할 뿐. 


이상하게도 그 시절의 기억은 매서운 바람과 눈으로 꽁꽁 얼어붙은 한겨울이 아니라 꼭 이맘때, 옷을 여미고 돌아갈 준비를 하는 동장군이 왠지 아쉬운 듯 세상에 눈발을 뿌릴 때, 새하얗고 가벼운 이불을 얌전히 덮은 대기 속에 희뿌연 봄의 빛이 출렁이는 2월에 불현듯 선연해진다.   



옅고 아련한 봄 입김을 담은 백白의 세상을 내다보며 문득 낭만을 생각한다. 첫사랑, 청춘, 추억, 비애, 우수, 허무, 미련, 충동, 반항, 열정이라는 단어가 옛 친구처럼 떠오른다. 궂은 날씨, 구름이 끼고 비가 한두 방울 떨어지거나 눈발이 흩날리면 한층 절묘한 감상으로 바뀌는 그 말, 분위기에 젖어 회상이나 넋두리로 변하기 딱 좋은 그 낭만.

오늘 날씨 어디에 낭만이 있나. 낭만은 어찌 보면 환상이고 비현실적인 감정을 담고 있다. 나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현실감각이 떨어지는 지금의 시간을 돌아본다. 스쳐가고 다시 돌아오지 않는 것들에 대한 애잔함은 가슴 깊은 곳의 무언가를 자꾸 건드리고 헤집는다.

젊을 때는 무엇을 해도 넘치고 흔한 게 시간이었는데 이제 젊지 않아서, 청춘은 다해서, 내 삶의 시계는 낭비를 허용하지 않으려 한다. 얼마 남지 않았을 기회, 흩어져 사라지는 추억이라서 아프다. 아직도 실패를 통해 배울 수 있고 좌절도 행복으로 가는 과정이라며 대수롭지 않게 웃어넘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좋아도 좋은 줄 몰랐던 가버린 시간들과 이 순간도 충분히 충만한 시간인데 모르다가 나중에서야 한숨 지을 어느 시간을 생각하니...... 그래, 날이 참 낭만적이다.



글 쓰는 사람은 글 앞에서 편안하고  행복해야 한다.
글을 쓸 때 주눅 든 상태가 아니길 바란다.
설사 나만 보는 일기가 아니라 대중 앞에 발표되는 글이더라도 마찬가지다.
그러려면 자기 내면에 야단치는 존재가 없어야 한다.
 
*박미라 《치유하는 글쓰기》  


헌책방이자 북카페, 소극장 음악감상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들만 쏙쏙 골라 쌓아 놓은 삼단 과일 케이크처럼 달콤한 곳. 나는 2월의 푹신한 눈을 밟고 와 겨울곰처럼 행복하게 앉아 책 읽고 글 쓰고 뷰멍을 한다. 그러다가 박미라의 문장에 혼쭐이 나고 만다. 나의 내면은 쓰기를 갈망하다가 금세 주눅이 들고 이렇게 밖에 못쓰냐며 야단을 치다가 이 정도라서 어쩌겠냐며 하소연을 지겹게 늘어놓고 있던 중이다.


어쩌면 도돌이표 같은 쉼 없고 지치는 반복일지도. 그러나 일시정지란 이럴 때 써먹으라고 있는 게 아니겠는가. 글쓰기에 임하는 한결같은 마음을 무한 재생이라고 착각하지 말기, 좋아하는 트랙을 만나면 잠깐 한숨 돌리기. 문장의 멜로디와 구성의 박자에 맞춰 시작과 멈춤을 즐기는 리듬을 슬슬 타본다.



글쓰기는 밥이다. 날마다 읽고 쓰는 자는 항상 배고픈 자이다.
내면 고갈이 없었다면 글 같은 건 쓰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불행하지는 않았을 테니까. 여기까지 온 것은 불굴의 의지 때문이 아니다.
내 안의 끝도 없는 배고픔, 즉 갈망과 고갈이 만든 환각이 나를 '백지'라는 바다에 투신하도록 이끌었다.
 
*장석주 《글쓰기는 스타일이다》 


나에게 글쓰기는 무엇인가. 나는 오늘 헌책방이자 북카페, 소극장 겸 음악감상실인 곳에 앉아 있으니 아무래도 나에게 글쓰기란 그중 하나일 것이다. 즐거운 마음으로 하나를 골라본다. 자, 오늘 나의 글쓰기는 '풍경'이다. 


커피를 마시며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있지만 오래 바라보는 건 내 눈앞의 풍경이니까. 뷰멍을 하면서 나는 과거를 회상하고 현재를 만끽한다. 아마 미래도 꿈꿀 테다. 온갖 기억을 떠올리고 별의 별것을 상상하는 이유는 글을 쓰기 위해서니까. 날마다 배가 고프고 내면의 허기를 느끼는 까닭은 글 같은 글을 쓰고 싶어서니까. 


문장 속을 걷는다는 것, 글과 일체가 되어 나아간다는 것, 왜 그래야 하는지 끝없는 의문 속에 질퍽거리고 거추장스럽다가 가끔은 무섭고 홀로 쓸쓸해지는 순간들이 모여 있는 곳. 하지만 그 풍경 속을 걸어보지 않으면 모른다. 젖어든다는 것이 어떤 건지, 걷는다는 것이 어떤 기분인지, 그리고 그 느낌을 결코 놓을 수 없으리라는 것도. 마지막 마침표를 찍기 전까지는 알 수 없는 황홀한 환각이 오늘도 백지의 바다에 투신하게 한다.



어릴 때부터 나에게 책방은 위안의 세계였다. 책을 베고 잔다고 그 속의 지식이 내 것 될 리 없지만 책 속에 파묻히면 일심동체가 된다는 터무니없는 믿음이 나에겐 있다. 숲 속의 식물들이 내뿜는 피톤치드가 심리적 안정감을 주고 살균 효과가 있듯 책들도 생리활성물질을 내뿜는다고 여전히 생각한다. 항산화, 해독, 면역 기능을 하여 노화를 지연시키고 스트레스를 차단하며 천연 진통제가 되었다가 각성제도 되리라는 나만의 기도를 올린다.


나는 낭만과 투신과 믿음의 기운을 가득 들이마시다가 내뱉는 복식호흡을 하며 글의 숲을 거닌다. 비가 오면 오는 대로 눈이 내리면 내리는 대로 더우나 추우나 머문다. 그 안의 공기 시스템은 언제나 포옹과 만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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