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음 열넷 ; 우수雨水에 걷는 도쿄의 낮과 밤
우수雨水의 오늘.
겨우내 꽁꽁 꼼짝하기 싫던 나의 마음이 '어서 와, 이제 그만 올 만하잖아'라며 성급하게 봄을 부르던 입춘 무렵에 몽글몽글 고운 눈이 내려 세상을 하얗게 덮었다. 그리고 얼음 밑에 갇혔던 강이 제 모습을 드러내고 곤히 잠들었던 개구리가 부스스 눈을 뜬다는 경칩을 두 주 앞둔 오늘은 종일토록 추적추적 비가 내려 세상은 뿌연 안갯속에 잠겼다. 봄을 향한 그리움은 꿉꿉한 습기를 가득 머금은 무채색 하늘에 흡수되었고 하루종일 칙칙한 우울 속에서 나의 시간은 정처 없이 부유했다. 검고 진한 커피를 연거푸 들이켜며 한 달 전의 낮과 밤을 헤매던 기억은 자꾸만 그 시공간을 소환하고 있었다.
바다 건너 이웃 나라의 시공간에는 '빨리빨리' 보다 '천천히'의 여운이 곳곳에 서려 있다. 어떤 경우에도 재촉하지 않고 기다릴 줄 아는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주인은 그저 상냥하게 맞아주고 손님은 문 앞에서 공손하게 안내를 요청하거나 밖에서 자기 차례를 조용히 기다렸다. 가게 안의 사정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문을 열고 들어가 주문을 하고 아무 자리에나 앉는 모습들에 익숙했던 나에게는 놀라운 광경이었다. 나의 생각과 요구가 늘 최우선이 아니라는 것, 조급해하지 않고 잠깐 멈춰 있는 태도, 기다림은 내 시간을 빼앗는 게 아니라 너그러움을 주고 여유를 배우게 하는 시간이었다.
사진 속 풍경들은 꿈을 꾸며 시간여행을 다녀온 듯한 기분에 사로잡히게 한다. 나는 시차 적응을 못한 사람처럼 비몽사몽으로 이쪽 세상과 저쪽 세상을 오가며 방황하고 있다. 현실에 쌓여 있는 일들을 빠르게 처리하고 곧 시작될 업무에 대비해 급히 준비를 해야 할 시간이건만 날씨 탓인지 기억 탓인지 다 핑계인지 나의 몸은 한없이 느려진다.
일단 멈춤 한 시간 안에서 밤이 찾아오고 내게 <어바웃 타임>이라는 영화 속 여행이 이어진다. 과거의 인생 안에서, 실제로 있었던 곳과 기억하는 곳으로 언제든지 떠날 수 있는 시간여행이라는 장치는 기발하다. 내가 원하는 시간대로 가서 인생을 새로 꾸밀 수 있는 능력이 주어진다면 나는 무엇을 하고 싶을까. 제일 즐거웠던 순간들을 무한 반복 끝없이 되풀이하거나 힘들고 슬픈 일이 절대 일어나지 않도록 상황을 계속 바꾸는 것이 좋을까.
영화가 비현실적이더라도 감동을 주는 이유는 우리가 간절히 바라는 인생이 '현실'에 있다는 사실을 깨우쳐주기 때문이다. 과거로 돌아가 원하는 대로 바꿀 때 현재의 내가 가장 사랑하는 중요한 무언가가 사라진다. 시간여행으로 고칠 수 있는 건 진정한 행복이 아니라는 사실은 내게 주어진 삶을 가치 있게 여기고 세상의 아름다움을 제대로 느끼며 살게 해준다. 바로 오늘이 시간 여행을 하는 날인 것처럼 나의 특별하면서도 평범한 날을 즐기는 것이 삶의 비밀이자 행복을 위한 유일한 공식이었다.
한눈에 서로에게 반한 메리와 팀이 데이트를 하는 장면이 나온다. 팀이 메리에게 직업이 뭐냐고 묻자 메리는 "출판사에서 원고를 읽는 게 저의 일이에요"라고 답한다. "돈 받고 책을 읽는 거예요? 와! 그건 돈 받고 숨을 쉬는 것과 같잖아요."라며 팀의 입에서 탄성이 터진다. 아마 메리는 팀이 말한 것처럼 생각하지 않았을 수 있지만 팀의 말에 그녀는 환하게 웃고 자기 일을 더 사랑하게 된다.
돈 받고 숨을 쉬는 것처럼 나의 일도 바른 쓸모를 갖고 천천히 즐기며 사랑해보는 건 어떨까. 봄의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듯 내 인생도 아른아른 가볍게. 이제 진짜로 시간 여행을 떠나봐야겠다. 부랴부랴 급하게 뛰는 날이 오지 않도록 자, 편안하게 숨을 고르고 슬슬 일을 시작해 볼까.
ps. BGM
<About Time> OST 중에서 Paul Buchanan - Mid Air
시간만이 당신을 나뭇잎을 날리는 바람으로 만들 수 있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