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확한 시작은 기억나지 않지만 초등 고학년 무렵부터 어른이 되어서까지 계속되었다. 나는 연필을 쥐고 종이 위에 무수한 원을 그리고 있었다. 작은 원에서 더 크게 점점 더 크게, 아주 크게, 끝없이 확장되는 달팽이관처럼. 어느 날 내 친구가 나에게 말했다. "넌 그걸 되게 자주 그리네?" 스스로도 의식하지 못한 행동을 그 애가 말해줘서야 나는 내가 왜 그럴까 짚어보게 되었다.
별 생각도 없는 단순한 행동에 의미를 부여하니 나름 심오해졌다. 그건 파장이었으니 그 말은 일이 끼치는 영향 혹은 영향이 미치는 정도나 동안을 비유적으로 일컫기도 하지만 물리학에서는 연속적인 두 파동의 동일한 지점 간 거리를 말한다. 하나의 점에서 시작되어 살랑살랑 잔물결 치며 차츰차츰 퍼져가는 편안한 기분, 작았던 동그라미가 커지며 연속된 무한 파장을 일으키는 설렘과 성취의 느낌, 파장이 길어졌다가 짧아지듯 너와 나의 거리가 가까웠다가 멀어지는 아련함의 반복이 나의 원 그리기 중독 안에 있었다.
넓은 원을 그리며 나는 살아가네
그 원은 세상 속에서 점점 넓어져 가네
나는 아마도 마지막 원을 완성하지 못할 것이지만
그 일에 내 온 존재를 바친다네
-라이너 마리아 릴케 「넓어지는 원」
어느 순간 나의 원에 누가 허락도 없이 들어올까 봐 덜컥 겁이 났다. 내가 그려놓은 곡선의 원형은 작은 것에서 큰 것까지 거리가 일정하고 형태가 반듯하며 참했다. 수많은 원 중에 하나라도 헤집어 놓으면 파장은 불규칙해지고 동심원의 물결은 흐트러진다. 하지만 원은 많아지고 커져가도 내부는 텅 비어 공허해지는 순간이 왔다. 나는 누군가의 둥근 곡선의 품 안에 들어가고 싶었다. 그러나 그 원의 둘레는 직선같이 곧았으며 한치의 틈도 없었으니. 나를 온전하게 안아줄 원을 찾아 헤매던 나는 생각을 바꿔 나의 원 안에 그를 받아들였다. 하나, 이어 둘, 마침내 셋...... 가득하게 채워지는 나의 원은 너의 원과 만나 다양한 원을 만들었다.
그는 원을 그려 나를 밖으로 밀어냈다.
나에게 온갖 비난을 퍼부으면서.
그러나 나에게는
사랑과 극복할 수 있는 지혜가 있었다.
나는 더 큰 원을 그려 그를 안으로 초대했다.
-에드윈 마크햄 「원」
나는 한때 내 무의식의 평화를 노래한 '원'에 대한 시를 읽고 생각에 잠긴다. 마크햄과 릴케의 원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와 나의 존재에 대해 말한다. 두 시인은 "다른 사람의 삶에 무언가를 보내면 그것은 모두 우리 자신의 삶으로 되돌아온다."라는 말과 "우리는 동심원을 그리며 인생을 살아간다."라는 말을 들려준다. 두 시는 서로를 밀어내지 않고 함께 하는 세상을 꿈꾸게 한다. 나는 원을 그리고 다른 원을 품기 위해 존재한다. 당신의 원은 얼마나 크고 넓은가, 그 안에 무엇을 담고 있는가. 나의 원이 파도가 되어 멀어졌다가 가까워지더니 선연한 노을빛에 물들었다.
ps. BGM 최유리《동그라미》
나는 그저 마음 하나를 빌린 건데 커져가니 닮아 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