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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주 Jan 15. 2024

나에게 다락이 있었네

걸음 아홉 ; 지나간 시간과 공간을 그리워하는 존재


언제부터였는지 모르게 다락은 동그마한 새 둥지 같은 것으로 기억되었다. 안으로 들어가 가만히 앉아 있으면 생각은 소요를 멈췄고 달차근한 숨 내음이 풍겨왔으며 잔잔한 호수의 물살에 참방참방 맨발을 디디는 느낌이 들었다. 



으레 작고 반듯한 창문이 있어 슬쩍 밖을 들여다보면 마당 풍경과 계절을 비추는 하늘이 네모나게 잘려 눈동자에 담겼다. 그러면 내가 굉장히 높은 곳에 올라와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몸이 절로 붕 떠오를 것만 같았다. 실제로 포로롱 하고 날아올라 나무의 삐주름한 우듬지에 앙증스레 자리 잡은 둥지로 포옥 안기는 간질간질한 기분, 이어 침침한 빛과 묵직한 공기, 온갖 잡동사니가 몽글한 인사를 건네던 내 유년의 다락은 잠잠했고 아늑했다. 



지난 가족 여행길에 충남 공주의 어느 한옥에서 하룻밤을 머문 적이 있다. 한국전쟁이 끝난 후에 한옥과 양옥의 형태가 공존하는 가옥의 형태가 많아졌는데, 1960년에 지어졌다는 그 집도 목구조와 높이, 창호 등이 일제 강점기 한옥의 특징을 가졌고 부엌 문과 창호 하단의 모자이크 타일이 시대적 특징을 잘 반영하고 있었다. 대문을 열면 보이는 소박한 마당이 데자뷔의 친숙함을 가져왔고 부엌 위에 이층처럼 위치한 다락은 안방의 미닫이 문을 통해 들어갈 수 있는 또 다른 세상으로 다가왔다. 예스러운 전통 한옥과 내 삶에 깃든 양옥의 느낌이 중첩되면서 옛 추억을 소환하는 시간 여행이 시작되었다. 


나는 대구에 있는 둘째 고모의 집에 있다. 1980년대에 연탄 판매업을 했던 고모를 우리 가족은 편하게 연탄고모라고 불렀는데 어릴 때 내가 놀러 가기도 하고 잠시 살기도 했던 그 집의 형태는 상당히 독특했다. 새카만 연탄을 층층이 쌓아놓은 가게를 통과해 다른 문을 열고 나가면 미음자 형태의 마당이 있고, 이름 모를 관엽 식물들과 수돗가를 빙 둘러싸고 고모네 살림집이 있었다. 고모와 고모부가 일을 하며 수시로 집에 들락거리던 가게에 딸린 문 외에도 투박한 철제 대문이 따로 있었는데 가파른 돌계단을 올라가면 대문 위로 빨랫대와 장독대를 놓아둔 좁은 옥상이 있었다. 물론 좋았던 건 안방에 딸린 다락이었다. 조심조심 발걸음을 떼어놓을 때면 삐거덕삐거덕하며 나무 바닥이 내는 기묘한 울림에 온 신경이 쏠렸고 텅 빈 공간에 떠돌던 먼지의 가벼운 흐름이 내 마음을 살살 간지럽혔다.



기억 속에 있는 또 다른 다락은 여행 이튿날에 전북 전주의 한옥에서 만났다. 대문 바로 옆에 우뚝 서 있는 키 큰 은행나무가 활짝 반겨주었고 대문을 넘어 소담스럽게 피어 있는 정겨운 꽃들이 화사하게 웃어주었다. 청신한 바람의 찰랑거림이 소곤대는 마루, 빗방울 점점이 떨어지던 깜깜한 밤의 운치, 톤다운된 아담한 색감, 단아한 나무집의 정취, 다정한 방 온기, 예스러운 지붕과 자개농 위에 곱게 개켜져 있던 색동 비단 이불의 아늑함, 햇살 어린 창 너머 풍경에 그만 반해버린 부엌까지. 살림살이가 살금살금 내리는 비가 되어 내 마음을 온통 적셔 놓고 만 한옥에 그것이 있었다.



다락방. 오래도록 나는 그 장소를 추억하며 진한 향수를 간직한 채 살고 있었다. 그 한 켠에는 초등학교 친구 은석이의 집이 있다. 가내수공업을 했던 은석이네는 복잡한 기계들과 부품들이 뒤섞여 그야말로 어수선했고 요란한 기계음과 낯선 사내들의 왁자한 번잡함이 있었다. 공장을 지나쳐 조심조심 깊숙이 걸어 들어가면 다소곳하게 자리 잡은 집 한 채가 보였다. 아스라한 내 기억 속의 집은 어쩐지 허술해 보였고 집안은 어두컴컴했지만 방 한구석에 있는지도 몰랐던 문을 열고 들어가면 다락으로 통하는 비밀의 공간이 있었다. 처음으로 그 집에 가던 날, 은석이의 손에 이끌려 두근두근거리는 심장을 달래며 한 칸 한 칸 나무계단을 올라가던 모습이 몇십 년이라는 세월이 흐른 지금도 어제 일처럼 선명하게 떠오른다. 



다락의 따스한 온도는 어린 내가 숨 쉬기에 적당했고 여린 몸을 동그랗게 빚어주는 습기를 살짝 머금고 있었다. 나와 은석이는 하루종일 방에 앉아 도란도란 별의별 이야기를 나누었고 은석이의 언니들이 건네주는 간식거리를 나눠 먹었으며 가위로 종이 인형을 오리거나 이젠 바비라고 불리는 엉성한 마른 인형을 한참 동안 가지고 놀았다. 어른들은 살기 바빴고 놀잇감이 부실했던 시절이었지만 우리는 말없이 하나가 되기도 하고 시끌벅적 수많은 사람이 되기도 했다가 조용히 내려앉는 어둠 속에 각자의 달콤한 잠에 빠져들곤 했다. 



나에게 다락을 품은 기억은 결코 사소하지 않았다. 거긴 나를 외면하지 않는 묵묵함과 오로지 나를 응시하는 순박한 눈과 포근히 감싸 안아주던 손이 있다. 어둡고 휑한 겨울이면 나는 말없이 그 공간을 떠올려본다. 그 안에서 옹그리고 앉아 놀던 나를 자꾸 매만지고 쓰다듬는다. 기억 속 장소와 시간들은 소리 없이 사라져 버렸고 그 사실은 나를 울적하게 만들지만, 의식 안에 얌전히 잠들어 있던 다락과 주변을 맴도는 사람들이 가끔 기지개를 켜며 일어난다. 나와 다시 놀아주는 그 시간이 있어서 아직 외롭지 않다. 그래서 한 번 말해 주고 싶었다. 떠나가고 지나쳐 버렸어도 남아 있는 다락의 이야기를.




ps. BGM

사는 건 예상과 다른 현실을 마주하는 일
삶은 끝을 알 수 없는 이야기
그래도 한 번 말하고 싶었어
떠나가 버린 지나쳐 버린
흘러간 내 노랫말 같은 얘기

* 윤기타 《끝을 알 수 없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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