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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주 Jan 01. 2024

추운 계절이 주는 산책

걸음 일곱 ; 하룻밤 사이 함박눈을 맞은 동네 한 바퀴



볼을 스치는 겨울의 손 끝이 알싸하다. 그토록 매운바람으로부터 몸을 보호하기 위해 수시로 옷을 매만져 잘 여민다. 미끄덩하지 않으려는 나의 두 발은 더듬이가 되어 단단한 바닥을 찾느라 자꾸만 느려진다. 너무나 선명한 그래서 온전한 겨울 공기가 나의 의식을 꼿꼿이 세운다. 몸 안팎의 온도차가 눈동자에 습기를 자아냈을까. 온기를 머금은 내 몸이 차가운 온도에 내리닫자 눈에 물기가 서린다. 이내 방울방울 맺혀 떨어지는 그건 환희와 참회의 눈물임을 밝힌다. 순백의 자연을 담은 나의 마음이 까닭 모를 뭉클함에 사로잡히고 온통 새하얀 눈부심이 순수하지 않은 마음을 녹여 주르륵 흐르게 한다. 설경을 품어 안고 순수한 땅에 발자국을 남기려는 마음이 조급하다. 건조함에 갈라지고 찬기에 부르튼 입술은 감탄사를 터트려 허공을 촉촉하게 가른다. 하늘을 가득 덮은 함박눈이 온 땅에 내려 홀연히 사라질까 봐 나는 홀린 듯이 집을 나와 길 위에 섰다.



공원 언덕에 이를 때까지 인적은 없고 세상은 더 고요해진다. 텅 비워진 공간에서 나는 조용히 걷고 평소 바라보지 않던 것들에 눈길을 주고 머릿속을 꽉 채우고 있던 온갖 생각들을 게워 낸다. 눈가가 젖고 마음이 아련해지자 문득 외로움이 밀려든다. 이런 길을 혼자 걷는 게 아닌데, 어쩌자고 여기에 온 걸까. 춥고 마음이 시려 나는 그만 산책을 멈추고 싶어진다. 아, 그런데 이건 무슨 느낌일까. 나는 두리번거리며 주변을 둘러본다. 숲 안쪽 어딘가에서 새들은 이 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활기차게 노래를 부르며 "이것 봐, 너는 혼자가 아니야."라며 요란하게 말해주고, 눈을 뒤집어쓴 나무들은 "여기 이렇게 우리가 있잖아."라며 따뜻한 숨결을 내뿜어준다. 산책로로 접어든 내가 향할 길을 바른 이정표가 손짓해 주고 반듯한 계단이 맞아주더니 숨을 돌릴 수 있도록 여백이 안아준다.



뽀드득뽀드득 하얀 숲을 거닌다. 누구의 발자국도 찍혀 있지 않은 뽀얀 길을 걷고 지나간 한 해를 되돌아보며 "그땐 왜 그랬니?" 이성적으로 반성하고 "괜찮아, 잘했어!" 감성있게 칭찬도 해준다. 새해를 구상하며 지금보다는 조금이라도 나은 사람이 될 수 있기를 기원한다. 볼이 얼고 발은 젖었지만 일부러 눈이 더 많이 쌓인 길을 찾아 걸어 들어간다. 한해의 고생스러웠던 마음이 그 눈에 묻히고 걸음걸음마다 새로운 발자국을 내며 다시 나아갈 수 있기를 희망한다. 눈 속에 숨겨진 '나'를 발견하고 더불어 발맞춰 걸을 '사람들'을 떠올리며 내 눈은 깜박깜박 작지만 또렷한 빛을 내며 앞을 응시한다.


"경아! 네가 교수가 되었을 때 진심으로 축하해주지 못했어. 미안해.", "강 선생님, 저희 시아버님이 돌아가셨을 때 건네주신 부조금을 감사한 마음으로 받지 못해 너무나 죄송합니다. 건강하시기 바랍니다.", "엄마, 저희 집에 오고 싶어 하셨을 때 제가 바쁘다는 핑계를 대며 싫다고 말해서 정말 정말 죄송해요.", "여보, 마냥 편하다는 이유로 짜증을 자주 내서 미안해요.", "두 딸, 나이만 많이 먹었지 너희보다 철이 덜든 엄마를 이해해 줘서 고마워, 사랑해!", "첫째 형님과 둘째 형님, 함께 하고 싶어 하는 마음 잘 알아요. 서툴지만 다가가려고 노력하는 저의 마음을 보듬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화, 순, 신. 몇 안 되는 나의 소중한 친구들아, 오랜 세월 내 곁에 있어주고 외롭지 않게 해 줘서 고마워.", "숙 씨, 이젠 아무런 감정도 남아 있지 않아요. 속상과 미안을 안녕으로 바꾸며 그저 행복하기를."

상황은 다르지만 나는 이선균 배우처럼 고독한 죽음을 홀로 맞을 그날이 나를 찾아오기 전에 기안84가 되어 그동안 살며 미처 표현하지 못했던 속마음을 조심스레 꺼내본다.



아프고 불행한 사람이 없었으면..... 겨울이면 나무는 벌거숭이가 되지만 눈은 포근한 이불이 되어 덮어주고 꽁꽁 얼어붙은 바람이 결국 열매를 맺고 싹을 피워 올릴 힘이 되어주듯 세상 사람 모두가 나무처럼 열매처럼 꽃처럼 튼튼하게 뿌리내리고 푸르른 가슴으로 빨간 행복을 터트렸으면 좋겠다. 나라는 인간은 보잘것없을지라도 나의 기도는 깨끗한 겨울과 반짝이는 눈 속에서 한없이 그윽해지고 맑아진다. 진심 어린 고백이 그들에게 가닿기를 바라는 나는 이제 더 이상 외롭지 않다. 하얀빛이 안수按手가 되어 나를 어루만진다.




ps. BGM



초라한 모습 보여줄 순 없어 또 가면을 쓰고 널 만나러 가
But I still want you
외로움의 정원에 핀 너를 닮은 꽃 주고 싶었지 바보 같은 가면을 벗고서

*전하지 못한 진심 - B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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