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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주 Dec 25. 2023

변하는 계절과 변하지 않는 것들

걸음 여섯 ; 월곶 정미소 카페

계절을 대하는 마음이 시소처럼 오르락내리락한다. 


날씨가 추우면 춥다고 바람이 분다고 비가 내리고 눈이 내린다고 마음은 쓸쓸했다가 심쿵 설레고 그리움이 밀려왔다가 세상이 눈부시도록 아름다워 보이더니 언제 그랬냐는 듯 싫어진다. 


그건 사람을 대하는 마음과도 비슷하다.


나는 사람 때문에 마음이 쓸쓸했다가 심쿵 설레고 그리움이 밀려왔다가 세상이 눈부시도록 아름다워 보이더니 언제 그랬냐는 듯 싫어진다.


그러나 계절과 마주 앉으면 서로의 마음이 읽히는데 누군가와는 마주 앉아도 아무의 마음도 읽히지 않아 가끔씩 슬프다.



1978년 김포시 월곶면 고막리에 월곶협동정미소가 문을 열었다.


창고에는 출하를 기다리는 쌀포대가 그득하니 쌓이고 윙윙거리며 쉼 없이 돌아가는 복잡한 기계들 사이로 땀 뻘뻘 흘리며 일하는 일꾼들의 활기찬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세월이 흐르고 흘러 그곳은 카페가 되었고 예전에 쓰던 기계들은 고스란히 보관된다.


벼와 현미 투입탱크, 돌과 이물질을 고르는 석발기, 벼와 겉껍질을 분리하는 현미기, 균등 품질의 쌀로 분리하는 미각기, 쌀에 윤기를 주는 연미기, 벼를 찧어 희고 깨끗하게 만드는 정미기, 기계 동력 장치인 원동기 등 이름과 기능은 생소해도 외형은 정겨운 기계들이 방앗간의 오랜 이야기를 들려준다.



마음이 추운 계절에는 몸이라도 따뜻해야지. 가족 3인방은 메뉴를 고르느라 여념이 없는데 나는 옛 기계들과 건물의 벽과 천장을 보느라 정신이 팔려 있다. 나는 왜 이렇게 오래된 장소를 좋아하는가.


내가 찍은 사진과 물음을 보던 옛 친구가 말해준다. 오래된 건물은 예전에 살았던 사람들의 목소리가 저장되어 있다고. 어느 책에서 읽은 이야기 한 토막도 떠오른다. 겨울에 강이 얼 때 소리도 같이 얼었다가 이듬해 봄에 얼음이 녹으면 소리가 되살아난다는 것. 강을 건너던 사람들은 어느새 전부 사라졌지만 봉인된 소리는 시간이 흐른 어느 봄날, 강가에 선 사람들의 귓가에 바람을 타고 들려온다는 말이다.


옛사람들의 숨결, 감정, 흔적들이 나의 호흡과 기억이 빚어내는 상황과 맞아떨어지면 여러 생각이 뒤엉퀴고 그 단편들이 불쑥불쑥 튀어나온다는 믿을 수 없는 마력과 같은 이야기들. 친구는 믿거나 말거나라며 덧붙이지만 나는 그 말들을 온전히 믿는다. 상상과 환상은 삶을 안전하게 해 주고 다른 생각으로 옮겨갈 수 있게 해 주며 예상하지 못한 시간을 만들어준다며.



문득 정신 차려보니 어서 메뉴를 고르라는 딸들의 성화가 들려온다. 나는 과일향이 나는 문수산 블랜드에 곡물퐁과 흑임자 가루가 곁들여진 방앗간 시그니처 크림커피를 고른다. 두 딸은 수제청 딸기 라테와 제주 레몬 인퓨전, 남편의 원픽은 강화 한뿌리 인삼 라테다.


곁들임 빵 중에 엄지척은 마스카포네치즈 크림과 고막리 블랜드 에스프레소를 머금은 우리쌀스폰지 됫박 티라미수, 그리고 기타 등등에 소금빵, 쌀만쥬, 쌀모카번.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 어두워지는 거리를 추적추적 내리는 비가 적시고, 한때 정미소였던 카페에는 은은한 재즈 선율이 흘러넘친다. 
계절 때문이든 인간 때문에든 마음이 제아무리 시소를 타고 오르내리더라도, 누군가 오래오래 내 곁에 있다는 사실 단지 그 하나 때문에 언제나 뭉클하다. 삶이 따뜻해져 온다.



ps. BGM

나의 등 뒤에 네게 보이는 세상이 무너진다 해도
넌 그대로 나의 앞에 여전히 앉아있어 줄래
아무것도 알 수 없는 그런 나 주저앉지 않게
널 사랑해 널 사랑해 마주 앉은 너를 사랑해
너의 등 뒤에 내게 보이는 세상이 무너진다 해도
난 그대로 너의 앞에 여전히 앉아있어 볼게
아무것도 알 수 없는 그런 너 주저앉지 않게

- O.O.O <시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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