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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주 Dec 11. 2023

아직 어디에 있는지 몰라요

걸음 넷 ; 북촌 골목과 북악스카이웨이

나는 걷는다.

그건 육체의 건강을 위한 일 텐데 아마 정신 건강을 위해서라는 말이 조금 더 맞을 수 있겠다. 말없이 생각도 없이 담담히 행동을 이행하는데 마음을 쏟는 일에는 나름의 과거가 있다.


내가 대략 열 살이던 무렵, 집안에 우환이 있어 대구 동대구역 근처에 있는 큰 이모집에 한동안 맡겨진 적이 있었다. 그 시절 나는 친척 오빠의 자전거를 빌려 타고 신암동 지역을 정처 없이 돌아다녔다.


북촌 골목길은 옛날 생각이 나서 언제 걸어도 마음이 편안하다


어디가 어딘지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전혀 모르면서 이 골목 저 골목을 마구 헤매었고, 어쩐지 과감해지는 바람에 동네를 벗어난 적도 많았다. 큰 찻길을 건너고 낯선 건물을 바라보며 오가는 사람들을 지나쳤다. 어지러운 골목길을 구불구불 돌아 오르막길과 내리막길을 번갈아 오르내렸고 양갈래길이 나오면 자전거를 세우고 어느 길로 갈지 한참 서서 고민을 했으며 막다른 골목이 나오면 다시 돌아 나오기도 여러 번이었다.


양 볼이 새빨갛게 부르트고 작은 두 다리가 얼얼해질 때쯤이면 숨이 턱까지 차오르고 심장은 가슴을 뚫고 나오려는 듯 불퉁불퉁 요동쳤다. 이모네 집은 기차역 주변의 아파트였지만 당시 신암1동과 파티마 병원 뒤쪽의 4동 넓은 지역은 단층 주택이 대부분이었다. 아주 큰 수양버들이 있었고 작은 논바닥도 있어서 아이들이 옹기종기 앉아 얼음 스케이트를 지쳤고 컹컹 짖어대는 큰 개들이 자전거에 따라붙기도 했다.  


수많은 광경을 지나쳤지만 내가 속한 광경은 어디에도 없었다. 나는 항상 혼자였지만 그다지 서운한 기분은 아니었는데 바람결에 어느 집 담벼락을 타고 넘어오는 된장찌개 냄새를 맡을 때면 그만 글썽글썽해지고 말았다.


차도 없고 사람도 없고 조용한 길을 오래 걷는다


열두 살이 되어 흩어졌던 가족은 다시 모여 살며 안정을 되찾았지만 나의 시간은 부유하고 있었고 학교와 친구들 사이에서 겉돌았다. 그러다가 한 번씩 참을 수 없는 마음이 되면 모르는 버스를 아무거나 잡아타곤 했다.  버스는 나를 전혀 다른 세상으로 데리고 갔고 어디에 도착할지는 짐작할 수 없었다.


순식간에 지나가는 가게 간판에 쓰인 글자들을 하나하나 읽으며 어째서 저런 상호를 지은 걸까 연유를 가늠하고 마음대로 지어내면서 까닭 없이 웃었다. 무표정한 얼굴로 버스 정류장에 멀뚱히 서있는 사람들을 보면 부질없이 슬펐고 불 꺼진 어두운 방에 누군가 혼자 울다가 지쳐 잠들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하릴없이 마음이 놓였다.


버스에 있던 사람들이 하나둘 내리면 어느덧 종점에 다다랐고 나는 텅 빈 버스에서 내려 회차하는 텅 빈 버스에 올라타 왔던 길을 다시 돌아왔다. 그리고 어둠에 묻혀 있는 집으로 들어갔다.


걷다가 하늘 한 번 올려다보고 바닥 한 번 내려다보고 나무를 보고 지붕을 보고 담벼락을 보고


나는 걸으면서 생각한다. 내가 너그럽고 화합을 잘하는 사람이 되기엔 부족하다는 생각이다. 알고 있어서 그런 사람이 되려고 했다. 그런데 너무 애썼나 보다. 원하는 사람이 되지 못하는 나라서 오히려 괴로웠다. 살면 살수록 모르는 이들과 보조를 맞추는 일의 어려움을 실감했다. 알고 있으니 다행이라고 그러면서 또 배우는 거라고 자책하지 마라고 내 마음 토닥이며 잠시 멈춘다. 인간은 매번 새로운 모습으로 변해 있을 테고 그 내면은 나에게 영원한 비밀인 셈이다. 내 목소리는 작아지고 낮아지고 말의 샘이 말라 그 웅덩이에는 고요함이 남았다.


걷다가 저 멀리서 다가오던 사람이 갑자기 시선을 바닥으로 향하는 걸 발견한다. 혹은 하늘, 아니면 옆에 있던 사람과 괜히 딴청, 어찌 되었든 그 사람은 내가 서있지 않은 방향으로 눈을 휙 돌린다. 그 이는 내가 아는 사람이다. 나를 못 본 척하는 모습이 내게는 너무 잘 보인다.


나는 그들이 보이지 않는 곳에 선다. 늘 내 편인 사람들, 언제나 내 곁을 지키는 사람들, 있는 그대로의 나로 있게 하는 소중한 사람들과 보조를 맞춘다. 그 몸의 존재들에게 화답하고 그 시간의 동반에 발맞추어 걸으면서 댕강댕강 잘려나간 내 마음 조각들이 영원 같은 숨을 내쉰다. 이제 사는 게 편하다.


지나간 시간을 돌아보면 순수하게 싫고 끔찍했던 순간이 있었나 싶다. 물론 없었다는 말은 가짜, 그래도 내 기억을 사로잡는 건 좋았던 감정의 편린이며 가슴에 남는 건 흐뭇한 순간의 조각조각이고, 그건 마치 잔잔하게 울렁이는 아련한 파도와 같아서 내 마음에 물결치며 여전히 추억하며 사는 것 같다.


살다 보면 좋은 일도 나쁜 일도 있기 마련이지만 결국 다 똑같다는 말은, 모든 건 지나가기 나름이고 한참의 시간이 흘러 돌아보면 그저 하나의 옅은 흔적으로 남기 때문이 아닐까. 그 시절에 대한 희미한 미소.


북악스카이웨이 팔각정에는 어두워야 아름다울 풍경이 있다


나이가 들수록 치사해져서는 안 된다. 하지만 이야기할 수 없는 소재가 있다. "그냥 네 본성 자체가 마음에 안 든다"는 말 같은 건 해서는 안 된다. 그런데 나는 마음에 안 들면 티를 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라서, 반드시 내 마음을 드러내고야 만다. 아아 관대한 마음, 그건 어디서 파나요?

한수희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아아 관대한 마음, 누가 제발 나에게 팔면 안 되나요?


북악산 능선을 따라 자하문에서 정릉 아리랑 고개에 이르는 북악스카이웨이를 달려달려 팔각정에 오른 날. 밤하늘의 별과 달을 올려다보고 서울 도심을 내려다보며 나를 우러르고 굽어본다.

티 쫌 팍팍 내지 말고 거짓부렁 없이 치사빤쓰하지 않게!


마음의 속도는 30킬로미터, 빨간불 초록불 관계의 신호등은 잘 지키며 감정의 쓰레기통도 제때제때 잘 비우며 살게 해 주세요. 나는 하느님도 부처님도 아닌 달님에게 맨날맨날 빈다.


완벽할 순 없지만 어쩔 수 없는 인생은 또 아니라서.


나는 다시 걷는다.


빨간불도 아니고 초록불도 아닌 노란불, 깜박깜박 그건 내 마음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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