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주 Dec 04. 2023

청운 아래 초소가 있었다

걸음 셋 ; 청운문학도서관과 초소책방




淸雲인데 왜 靑雲으로 생각했을까?

그때 나는 어째서 푸른 빛깔 구름일까 곰곰이 헤아렸던 것 같다. 그러고 보니 우리는 푸름이라는 단어를 참 두루두루 사용한다. 파란 하늘이나 바다를 보고도 푸르다, 잎이 무성한 나무나 초록 신호등을 보고도 푸른색이라 하고 빛깔이 밝고 선명하거나 당당하고 생기가 있을 때, 포부가 크고 아름다우며 깨끗하고 신선한 것도 푸르다고 한다. 뜻이 많은 만큼 쓰임새가 많고 쉽게 의미 부여를 하면서 느낌을 잘 표현할 수 있으니 여기저기 다양하게 쓴다.

푸르다. 하나의 말에 좋은 걸 다 가졌으니 푸른 근사함이다.

하지만 맑고 깨끗한 구름도 더할 나위 없다. 에는 '고요하다, 사념이 없다, 탐욕이 없다'라는 뜻이 담겨 있으니 도서관의 이름으로 마침맞다.


눈 아래 오붓한 한옥 지붕이 보여 흔연한 마음이 성큼 내달린다. 나무 계단을 사뿐사뿐 뛰고 굵은 가지들이 구렁이같이 뒤얽혀 어깨동무를 하고 있는 오솔길을 경탄하며 내려간다.



숲에 둘러싸인 한적한 산사를 걷는 기분이다. 그리 단단하지 않은 흙길을 밟으며 푸른靑 나무가 내뿜는 맑은淸 공기를 천천히 들이마시는데 늘 곁에 두고 보는 책에 나오는 한 구절이 문득 떠오른다.


"내가 바깥세상이라고 부르는 곳에는 생각들이 모여 있어서 사람들이 불러주기만을 기다려."

 

한옥도서관에 서서 나는 여기가 아닌 다른 어딘가에 모여있는 생각들을 불러본다. 그 옛날 책을 아꼈던 세종대왕의 생각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인자한 어머니였던 신사임당의 숨결로 가슴을 채운다. 그들은 바로 내 옆에서 한걸음 한걸음 지그시 발맞추어 걷는다. 나는 눈길을 돌려 그 존재의 당위성을 구태여 확인하지 않는다. 어릿어릿 나부끼는 몸짓의 그림자가 나의 몸을 보듬고 마음을 녹인다. 그들이 살았고 거닐었을 고즈넉한 공간이 나에게 다가오고 연달아 말을 걸어온다. 그 시간은 멈추고 싶지 않기에 발걸음은 멈추지 않는다.


그런데 다른 이들은 모두 어디에 있는 것인가. 인적은 사라지고 침묵이 새벽안개처럼 고요하게 내려앉는 찰나 어디선가 난데없는 탄성이 터져 나온다.



아! 그건 청운낙수淸(靑)雲落水였다. 정자에 앉아 있던 이의 '와!' 하는 짧은 외마디를 듣고 몰려든 사람들의 옹기종기 감탄 어린 시선이 반듯하게 잘린 창틀을 너머 물의 낙하로 향하고 있다. 혼자 배회하고 있던 나 역시 그 틈에 껴서 푸른 나무 아래 아담한 하얀 폭포를 하염없이 바라보는데 날씬한 멋쟁이 아가씨가 살며시 말을 걸어온다.


"사진 찍어드릴까요?"

내 생각을 읽은 정다운 생각이 맑고 푸른 구름이 되어 뭉게뭉게 피어오르더니 구름을 비껴 싣고 떨어지는 물줄기가 되어 마음의 골짜기로 흘러든다. 기운차고 싱그러운 물줄기는 세속의 감정을 씻기는데 잠시 머물다 갈 뿐인 나그네의 발길은 어디로 다시 향할꼬.


청운문학도서관에는 전통 한옥의 질박한 아름다움과 기억 속에 살아 꿈틀대는 이야기와 세월을 거슬러 말 걸어오는 생각들과 포부도 당찬 책들이 있었으며 어느 한 사람의 모습을 가장 아름다운 순간으로 남겨주는 보드라운 작은 손길이 있었다.    



떠나기 싫은 아쉬운 발걸음을 인왕산 숲길로 돌려 옥인동 (지금은 인왕산로이지만 난 '동' 이름이 옛 생각나서 한결 좋다)에 위치한 '인왕산 초소책방 : 더숲'으로 향한다. 그 이름은 왠지 세련되고 운치 있지만 '초소'라는 단어는 암울한 역사를 담고 있다.


1968년 1월의 일이다. 게릴라전 특수훈련을 받은 북한 무장군 31명이 임진강 얼음판을 횡단해 파주에 진입, 청와대를 기습하고자 산을 타고 서울에 침투했다. 많은 민간인과 경찰들이 희생된 (그 당시 유일하게 생포되었기에 이름 붙여진) 김신조 사건 이후 청와대 방호목적으로 초소가 건축되었다. 그 후 50년간 경계와 감시를 목적으로 인왕산 지역을 부분 통제해 왔던 그 경찰초소가 2018년 인왕산 전면 개방과 더불어 2020년 늦가을에 책방이 되었다.


얼마 전에 읽었던 신문기사가 생각난다. 오스트리아에 있는 히틀러의 생가를 경찰서로 활용하는 것에 대한 논란을 다룬 글이었다. 이는 추종자들이 모여 히틀러를 애도하거나 나치 독일을 신성시하는 장소로 악용할까 싶은 정부의 우려에서 나온 결정이라지만 지역 주민들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주민들은 생가를 유지하고 아픈 역사를 기억할 수 있는 박물관이나 전시 공간으로 재탄생하기를 바랐다.

생가가 남는다면 히틀러와의 연결고리가 유지되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 아예 다른 용도인 경찰서로 바꾸자는 사람들의 의견과 잘못된 역사일지언정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잊지 말고 기억할 수 있도록 생가를 보존하자는 이들의 주장이 팽팽히 맞서고 있었다.


다크 해리티지의 가치, 무고한 사람들이 희생되어 슬픈 역사의 현장이 된 장소가 바람직한 쓸모를 다하려면 어떻게 사용되어야 하는 걸까.



인왕산 기슭, 무섭고 아픈 이야기를 간직한 곳에는 상쾌한 산 공기, 자연과 도시가 다 들어오는 탁 트인 전경, 고소한 빵 냄새, 메마른 가슴을 적셔주는 차 한 잔과 사람의 온기, 그리고 책의 여운과 점진적인 힘이 있었다. 작은 몸과 더 작은 마음이 그 안에 머무르니 저 아래 인간 세상에 어떤 모순이 가득할지언정 여유롭고 넉넉한 위안으로 무사태평해진다.


초소는 책방이 되었다. 나는 초소책방이 옛날 경찰초소였던 시절 풍경을 오래오래 들여다본다. 시간은 달라도 같은 공간인데 어찌 이토록 쌀쌀맞고 쓸쓸해 보일까. 그 자리에 무엇을 담느냐에 따라 주변에 미치는 존재감은 전혀 다름을 느낀다.

마음의 결을 다른 방향으로 쓸어주는 또 한 가지는, 새로운 목적을 위해 기존 건물을 전부 사라지게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증축을 하며 원래 있던 골조를 일부 살리고 훼손되었던 자연을 복원하면서 그 자연을 전망할 수 있게끔 했다.



건물 주위를 한 바퀴 천천히 돌아본다. 그 흔적들이 곳곳에 있다. 시멘트 벽돌로 지어졌던 건물의 외벽을 철거하면서 벽체의 일부를 지하 계단의 난간으로 활용하거나 동측 외벽과 서측 외벽의 철제 출입문을 그대로 둠으로써 시민의 쉼터가 된 책방에 기존 초소에 대한 기억의 장치를 남겼다.

좋은 방향으로 쓰임을 달리하되 계속 기억해야 될 것을 존치함은 우리네 삶의 자세와 방향과도 자연스럽게 맞닿아 있었다.


이전 02화 깊은 우물에 바람이 분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