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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주 Nov 24. 2023

 낯섦 너머 소곤소곤한 이야기

걸음 하나 ; 교동도 은행나무와 대룡시장


"우리 쌍화차 한잔 하러 갈까요?"

커피도 아니고 전통차가 뜬금포 생각나다니!

며칠 감기를 앓고 나서인지 몸이 괜히 허하고, 쌀쌀한 바람이 부니 갑자기 뜨끈 뜨근한 그게 그렇게 마시고 싶다. 그래서 차를 타고 달린다. 황해도 북한땅이 지척인 섬마을 교동도로.


북한에 있는 수나무와 꽃가루로 이어진 천살 은행 할머니


교동면 무학리 은행나무의 오래된 말을 듣는다.

나무는 근 천년을 살았건만 북한의 연백군에 있는 수나무에서 아직도 꽃가루가 이 암나무로 날아와 은행이 가지가지마다 열린다고 한다. '이이는 언제부터 여기 이렇게 서 있었나?' 나무는 원래 고려 중엽 한 부잣집 뒤뜰에서 자라다가 어느 날 화재로 불탔고 이듬해 봄에 그루에서 새 가지가 돋아나와 우뚝하니 마을을 지키는 천년수가 되었다. 불과 3㎞ 남짓 떨어진 곳이지만 바다는 막막한 비무장지대가 되어 가로막고 해안선이 철조망이 되어버린 북녘땅에 서있을 나무와 그 아득한 세월 내내 꽃가루 나누며 부부의 정을 놓지 않고 있다니 애틋하게 마음이 놓인다.


한자리에 천년을 서있는 나무 주변을 자꾸만 돌며 까마득한 꼭대기와 얽히고설킨 가지들을 하염없이 올려다본다. 나뭇잎을 우수수 훑고 지나가는 바람의 노래를 들으며 거칠고 단단한 나무껍질을 가만가만 쓰다듬는다. 무성한 은행잎과 뒤엉킨 나뭇가지 사이로 따사로운 햇살이 내 얼굴에 내려앉고, 바닥에 떨어져 썩고 밟혀 이리저리 짓이겨진 꼬릿한 은행의 냄새를 맡으며 땅을 향해 비가 되어 쏟아졌을 노란 열매를 상상한다.


늦가을은 정녕 깊은 가을이라 색과 그림자도 그윽하다.


천년 나무를 품고 옹기종기 삶의 시간을 간직한 섬마을 옛집들에 내려앉은 다감한 색과 서름한 그림자에서 시선을 모로 돌리니 추수가 끝난 넓은 논 자락에 적적함이 스며 있다. 볏짚을 돌돌 말아 감싸놓은 마시멜로가 주는 말랑말랑한 추억 한 조각에 울컥하고, 쏴아아 메마른 갈대의 나부낌에 갈피를 못 잡다가 아아! 시리게 푸른 하늘과 새들의 고요한 하강에 내 마음은 어쩔 줄을 모른다.


가을을 보내주기 싫어 허둥대던 나는 한가득 넘쳐흐르는 풍경을 서둘러 눈에서 지우며 "이젠 정말 안녕!" 늦은 가을에게 작별을 고한다.


달걀 동동 쌍화차와 걸쭉한 대추차로 메마른 목을 씻어내고 다방 주인장의 옛 사진으로 추억을 풀어내고


무학리 은행나무 왕할머니와 살갑게 눈도장을 찍고 가을 배웅을 마친 나는 대룡시장을 거닌다. 몇 번 왔었지만 달걀 동동 띄운 전통 쌍화차를 드디어 맛본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볼 땐 왠지 비릴 것 같았는데 어르신들이 드시는 거라고만 생각했던 바로 그것인데 헐! 내가 마시다니, 근데 헉! 이렇게 맛나다니.


수란 먹듯 수저에 떠서 한입에 쏙 넣으니 신선하고 꼬소한 노른자가 입안 가득 사르르 녹아 순식간에 사라져 버린다. 남은 쌍화차에는 깨와 잣이 가득이라, 후루룩 마시고 냠냠 씹으니 달큰쌉싸름한 행복함이란 말해 뭐 해! 맛있다 맛있다 하는 나를 흐뭇하게 바라보는 남편은 진하디진한 대추차 한잔!


그래, 다방벽에 붙은 짠한 사진 속 글귀처럼 지금은 잊지 못할 나의 한 시절 아니던가.


구경만 해도 재미진데 시식하는 맛까지 있고나


바로 앞집 곳간에선 유자의 향긋함을 품은 달달한 오란다가 이 계절이 외롭지 않다 말해주고 달걀을 저렇게 아담하게 묶어 파는 건 처음보네하며 눈 반짝 신기했던 짚으로 엮은 달걀 꾸러미며 짚신, 빗자루, 소쿠리와 짭조름 꼬들꼬들한 새조개살, 땅콩, 당일 따온 표고버섯, 알밤, 보리빵, 모시떡, 강아지떡 등등 시장구경하랴 시식하랴, 아니 우리만 먹으면 워째 애들도 먹여야지 하며 보따리보따리 사서 손에 모아 쥔다. 그렇지 이게 시장통 맛이지. 재미나고나 정답고나 신나고나.


교동 극장, 궁전 다방, 다정한 민박... 저 벽 너머엔 어떤 이들의 이야기가 있을까


고향 집이 지방에 있는 탓에 나는 독립해 서울에서 살던 스무 살 중반 무렵부터 기차나 고속버스로 수시로 오갔다. 어딜 가든 시간에 쫓겨 서두르는 걸 싫어하는 편이라 늘 출발 시간 전 여유 있게 터미널이나 역에 도착해 상가나 주변을 어슬렁어슬렁 돌아다녔다. 그게 마음 편하고 재미도 쏠쏠했다.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에는 볼거리가 많고 지나가는 사람들 자체만으로도 구경거리가 되었으니 말이다.


아니 사실은 그보다 더 찌르르했던 건, 버스나 기차 안 나의 좌석, 좁고 꽉 막힌 한정된 공간이 주는 '아늑함'과 순식간에 휙휙 바뀌는 차창 밖 풍경이 전하는 '아득함'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건 그저 여행의 '낭만'이라고 부를 수 있는 감미롭고 설레는 감흥일 수도, 내가 모르는 세상을 한 컷 한 컷 '관통'한다는 신비롭고 적막한 기분일 수도, 사라지고 놓아버린 삶의 '단편'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가는 짠하고도 아련한 슬픔일 수도 있었다.


시장 골목에는 추억의 뽑기와 할매 몸뻬, 뉘 집 담벼락 위엔 옹기종기 제비 가족


나는 여기에 있다. 그러나 나는 여기밖에 없다. 


저기에 무엇이 있고 누구의 손길이 닿았고 지금은 또 어떤 이가 조용히 숨을 내쉬며 하루하루의 삶을 꾸려 가고 있을까.

오래전 움직이던 작은 차창 너머의 집들과 나무와 하늘, 사람의 희미한 그림자가 내게 들려주던 이야기를 어느 작은 섬의 소박한 시장, 비좁은 골목길과 허름한 옛 건물, 왁자한 사람들 사이에서 다시 귀 기울여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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