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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주 Jan 08. 2024

위로가 필요한 잿빛 겨울날은

걸음 여덟 ; 초록과의 오감 대화


가슴에 돌을 달아놓은 것처럼 묵직한,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스멀스멀 기어오른다. 모든 일이 시들시들하고 별 것 아닌 일에 화산이 되어 울화가 끓어오르는가 싶더니 사소함에 뭉클해지며 눈물바람이 된다. 기분이 자꾸 오르락내리락한다. 혹시나 싶어 인터넷 창을 열고 갱년기 증상을 검색해 보았다. 여러 가지가 주르륵, 그중 첫 번째가 우울증이었다. 


'우울'은 근심스럽거나 답답하여 활기가 없음이니 나의 증상과 얼추 맞아떨어지는데, 문제는 뚜렷한 원인을 알 수 없다는 데 있었다. 한동안 나는 까닭 모를 우울을 앓았다. 기분이 그러하니 주변 사람들에게서 마음이 멀어지고 고립을 즐기다가 이내 슬퍼지는 나 자신이 이해가 안 될 지경에 이르렀다. 도대체 왜 그럴까 스스로를 자책하는 일이 반복되었다.


우울증이 무서운 이유는 우울한 감정 그 자체보다 압도적인 자기혐오와 비판을 동반한다는 데 있다. 자기혐오와 비판은 그 어떤 기분도 느낄 수 없는 상태, 무기력과 좌절을 반복하는 상황으로 스스로를 몰고 간다. 그런 우울에 자연이 치료제 역할을 할 수 있다. 

- 윤대현 서울대학교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책을 읽다가 윤대현 교수가 쓴 글을 보게 되었다. 그는 자연과 소통하며 걷는 신체 활동이 우울증 치료에 도움이 된다고 썼다. 갑자기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 자연이구나. 자연이 날 부르고 있구나.



「침묵의 봄」,「우리를 둘러싼 바다」등 환경에 대한 바이블 같은 책을 쓴 레이첼 카슨은 "우리의 감각을 총 동원해서 자연과 사귀라. 감각은 기억과 인상의 형태로 우리 안에 남아 내적 풍요의 마르지 않는 원천이 된다."라고 조언한다. 자연을 보고 놀라는 감수성은 자신을 찾는 명상이 되고, 자연과 마주해 느끼는 정서는 인간에 대한 이해와 통찰을 안겨다 준다. 하늘과 땅, 흙과 물, 나무와 바위, 새와 물고기는 우리의 길동무가 된다.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 기쁨과 오랫동안 잊고 지낸 것을 일깨우는 즐거움, 생명의 숨결을 품은 자연과 하나가 되는 순간 온전한 '나'가 된다.   


날씨가 온화한 계절은 걷기에 가장 좋은 때다. 하지만 겨울에는 아늑한 둥지에 머물고 싶다. 집에만 있고 싶은 욕구는 늦가을과 겨울의 일조량 감소에 따른 민감성으로 활력이 떨어진 탓이라고 한다. 잔뜩 찌푸린 하늘과 매서운 바람, 꽁꽁 얼어붙는 찬 공기에 푸르른 무성함은 간데없이 사라지고 앙상한 가지만 바람에 떨며 바스러진다. 생명을 품은 대기 어디에도 촉촉함은 없고 두툼한 솜으로 습기를 훔쳐낸 듯 바삭바삭 갈라진다. 무채색으로 뒤덮인 풍경 속에 태양은 잿빛 구름 뒤로 숨어 간절한 그리움을 자아낸다. 먼지가 드리운 땅에 갈 곳을 잃고 섰던 나는 결국 초록을 찾아 나선다.  



겨울의 식물원이다! 눈앞에 좌르르 펼쳐진 온갖 푸름이들을 보자 나는 너무 좋아서 남편과 아이들에게 외친다. "어느 날 갑자기 나 없어지면 놀라지 말고 여기로 와." 

여럿이 함께 와도 좋지만 혼자서 초록이들 벗 삼아 사색에 빠지고 싶은 마음이 절로 든다. '세상에! 이렇게 생긴 애도 있어?' 놀라고, '와! 이런 질감과 광택은 처음 봐!' 감탄하면서 씨앗도서관에서 원하는 씨앗도 룰루랄라 받아 챙긴다.

 

그런데 처음 여길 왔을 때와는 기분이 새삼 달랐는데... 이상한걸? 같은 곳인데 왜 그렇지 곰곰 생각해 보니 지금의 나는 이전의 내가 아니었다. 이런, 나름 시름이 질겼나 보다. 말랑말랑 많이 부드러워진 나의 마음.



한때 내가 우울로 혼수상태였던 건 부드럽고 탄력 있게 세상과 사람을 바라보지 못했기 때문이었고, 맑고 천진한 눈으로 자연을 바라보는 방법을 잊어버렸기 때문이 아닐까. 정처 없이 헤매고 있던 나의 발길을 잡아 이끌어준 곳에 무언가가 있었다. 


내가 작은 요정에게 받고 싶은 선물은 해독제 같은 것이다. 그 해독제가 치료할 수 있는 증상은 이런 것들이다. 우리의 몸과 마음을 진실로 강하게 해주는 것에서 멀어지는 증상, 인공적인 사물들에 푹 빠져 헤어나지 못하는 증상, 너무나 똑똑한 나머지 모든 것에서 권태를 느끼는 증상……. 

* 레이첼 카슨 「센스 오브 원더」


나는 작은 요정을 만나러 왔다. 그리고 선물 같은 해독제를 받는다. 책이나 영상을 보거나 누구의 가르침을 받으며 터득하지 못했던 것들을 열린 눈과 귀, 마음으로 고스란히 느낀다. 자연은 스승이자 책이었고 고향이었다. 자연인의 여정에 시름은 녹아 사라지고 우울은 제 갈 길을 찾아 떠난다. 



그들의 색채와 몸짓을 눈으로 훑으며 끊임없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귀로 차곡차곡 담고 싱그러운 향기가 스며든 공기를 마음껏 호흡한다. 스치듯 어루만져 연고처럼 마음에 살살 바르고 조곤조곤 나누는 대화를 맛본다. 나의 오감은 그들을 순수한 친구로 받아들인다. 


식물들의 돌림노래, 자연은 오선지 위에 음표를 그렸고 나와 합창을 한다. 리듬에 맞춰 발걸음이 가벼워지더니 어느새 나의 심장에서 콸콸 뿜어져 나온 새빨간 피는 온몸을 순환하고 빨라진 맥박에 얼굴은 생기가 돈다. 우울이 뭐였지? 이제 나는 생기의 요정이다.  



결국 봄이 올 거라고 나를 다독이는 햇살을 받으며 마음의 평온에 이르는 오솔길을 걷는다. 내 마음속에 미묘하고도 간절한 전율은 감정을 도취시켜 기분전환의 물꼬를 튼다. 수시로 갈마들던 나의 영혼이 치유된다. 새롭게 태어난 나는 은근하게 안도감을 느끼며 친근한 회갈색 세상 속으로 다시 돌아온다.




ps. BGM

예뻐서가 아니다, 잘나서가 아니다, 많은 것을 가져서도 아니다. 다만 너이기 때문에, 네가 너이기 때문에 보고 싶은 것이고, 사랑스러운 것이고, 또 안쓰러운 것이고 끝내 가슴에 못이 되어 박히는 것이다.
이유는 없다, 있다면 오직 한 가지 네가 너라는 사실, 네가 너이기 때문에 소중한 것이고, 아름다운 것이고, 사랑스런 것이고 가득한 것이다.
꽃이여, 오래 그렇게 있거라.

* 정밀아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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