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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훈훈하니 Mar 03. 2021

말할 수 없는 비밀, 연애

행복해도, 속상해도, 고민이 생겨도 털어놓을 사람은 오직그대뿐


얼마 전, 한 온라인 커뮤니티에 ‘내 남자 친구는 진짜 멋있어요.’라는 제목의 글이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 이 글을 쓴 네티즌은 키가 큰 연하의 남자와 사귀고 있으며, 능력자라는 소리를 듣는 행복한 여자라고 스스로를 소개했다. 이어 남자 친구가 너무 좋아서 자랑하고 싶다고 말을 꺼냈다. 남자 친구가 자신들의 이야기를 주제로 칠판에 그래프를 그리며 강의를 하는 모습이 귀엽다며 감탄하기도 했다. ‘행복한 여자의 남자 친구 자랑’은 그야말로 인터넷에서 난리가 났었다. 얼마나 좋으면 동네방네 떠들고 싶었겠는가! 친구에게 애인 자랑을 하고 싶은 건 아주 자연스러운 심리다. 


스물하나와 서른아홉에 만나 7년을 연애했다. 그것도 비밀 연애. 처음에는 누군가 알아챌까, 조마조마할 때도 있었지만, 스릴 넘치는 순간들이 더 많았다. 복도를 마주하고 지나갈 때 살짝 스치는 손끝이 애틋했고, 모니터 너머로 우리 둘만 아는 눈짓을 교환하는 것도 은밀한 즐거움이었다. 업무 때문에 이야기를 나누다가 나도 모르게 나온 ‘연인 톤 목소리’를 서둘러 거둬들이기도 했다. 


시간 차 퇴근 후, 회사에서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서 그녀를 기다리는 시간이 한없이 설렜고, 안정 거리에 접어 들어서야만 맘껏 잡을 수 있는 손은 더 보드라운 듯했다. 야근과 휴일 근무가 잦은 터라 상대의 희생과 배려를 먹고 연애를 유지할 수밖에 없는 직업 특성상 우리는 서로를 잘 이해할 수 있는 완벽한 커플이라고 생각했다. 


짜릿한 스릴과 재미…. 하지만 완벽한 커플이라는 착각은 오래가지 않았다. 비밀 연애가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이별을 재촉하는 위험 요소들이 하나둘씩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우선은 비밀 연애는 시작할 때부터 문제가 되기도 한다. 우리의 경우, 사내연애는 물론 격한 나이 차이까지 입방아 오르기에 수많은 요소를 두루 갖추고 있다 보니, 사람들의 시선이 부담스러웠다. 처음에는 차라리 이럴 바엔 비밀로 하는 게 낫겠다 싶었다. 


분명 쌍방이 동의해서 그러자고 했다. 비밀 연애란 것이 본디, 한 사람이 비밀 연애를 제안하면 나머지 한 사람은 거절하기가 어려워진다. 설사 비밀 연애가 내키지 않더라도 상대방이 강력하게 주장하면 분위기를 망치기 싫어 어영부영 따르게 된다. 나도 우리의 특수한(?) 상황을 너무나 잘 알기에 비밀 연애에 흔쾌히 동의했었다. 하지만 시시때때로 불길한 생각이 들곤 했다. 진심이 아닌가? 내가 부끄러운가? 어쩔 때는 마음이 복잡해 잠도 오지 않았다. 쪼잔하게 보일까 봐 이런 감정을 솔직하게 털어놓지도 못했다.


주변 눈치 보느라 둘만의 시간을 만들기도 힘들었다. 끝나고 다 같이 치맥 하자는데 둘만 쏙 빠지면 커플인 게 티가 날 것 같아서 억지로 참석하는 술자리가 일주일에 두어 번. 10분 뒤에 만나자며 다른 방향으로 가는 척 따로 나섰다가, 약속 장소에 제때 도착하지 못해 하염없이 기다리기 일쑤. 간신히 만나 데이트를 하려고 해도, 혹여나 아는 사람을 만날까 끊임없이 주위를 살펴야 했다. 스릴 있다고 좋게 생각하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죄지은 사람처럼 숨어 다니는 것에 지쳐갔다. 

의도치 않은 다툼도 생겼다. 아무리 숨기고 또 숨겨도 사랑은 눈빛에서, 행동에서 다 티가 나게 되어 있다. 둘이 사귀냐고 의심받게 될 것은 불 보듯 뻔하다. 그런데 사람이 궁지에 몰리게 되면 괜히 오버를 하게 된다. 도둑이 제 발 저리다고 되레 큰 소리로 헛소리를 하게 되는 것이다. ‘쟤는 이성으로 느껴지지도 않아.’ ‘에이 나이 차가 너무 많은데 무슨 연애를 해요.’ 그럴 때면 서로가 본심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섭섭한 건 어쩔 수 없다. 결국, 상한 기분을 숨기지 못하고 툴툴거리게 될 때도 있었다.


가장 난감했던 건 다른 이성이 접근한다는 것이다. 공개 연애를 하면 다른 이성들로부터 내 애인을 보호하기 편하다. 상식적인 사람이라면 임자 있는 사람에겐 접근하지 않을 테니까. 하지만 비밀 연애를 하면 다른 놈이 내 애인에게 추파를 던지는 꼴을 보고도, 어떤 조치도 취하기 어렵다. 


여자 친구에겐 다른 신문사 기자 놈(‘놈’이라고 표현하고 싶었다.)들의 공세가 많았다. 내 애인한테 이성의 감정으로 접근하는 걸 알면서도, 적극적으로 나서서 말릴 수가 없다. 애써 쿨한 척, 만나보라고 부추기기까지 했다. 


“oo일보 기자가 공연 보러 가자는데 어떻게 할까요?” 

“같은 분야에서 일하는 사람들끼리 선후배로 친해지면 좋지. 한번 만나봐.”  


그다음 날

“외제차로 집 앞까지 데려다줬어요.” 

“레스토랑에 가서 맛있는 걸 먹었어요”


그녀는 나에게 아주 솔직하게 작업 거는 놈들의 신상과 상황에 대해 그것도 아주 디테일하게 말해줬다. 그럴 때면 나는 인자한 미소를 띤 채 ‘좋았겠네~’ 하고 넘겨야 했다. 허벅지를 꼬집어가며 끓어오르는 질투를 꾹꾹 눌러 담아야 했다. 


한참이 지나서야 알게 된 일이지만, 당시의 그녀에게도 비밀 연애가 주는 불안함이 많았다고 했다. 자기에겐 관심도 없고 일에만 파묻혀 사는 남자 친구를 시험해 보고 싶었다고 했다. 그래서 일부러 추파 던지는 남자 얘길 꺼내며 속을 긁어봤지만 그 남자랑 만나보라고까지 하니 속으론 더욱 화가 났었단다.

비밀 연애의 약점은 언젠가는 발각된다는 거다. 하지만 우리는 ‘프로 비밀 연애러’들처럼 끝까지 잘 숨기고 싶었다. 혹시라도 결혼을 하게 된다면 같은 회사 직원은 물론 동종업계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결혼식장에서 충격과 박수의 공존을 느낄 것이다. 두려웠던 건 뒷감당이다. 배신감에 부들부들 떨고 있는 친구들에게 구구절절 일일이 설명하고 해명하고, 죄지은 사람처럼 사과하고 다니다 보면 현타가 올 것이다. 어차피 이렇게 될 거 그냥 처음부터 말할 걸…….  


무엇보다 비밀 연애의 가장 큰 괴로움은 ‘본의 아니게 거짓말쟁이’가 되어야 한다는 거다. 특히 친구에게 연애 상대를 감춘다는 건, 일상의 거의 모든 일을 감추는 것과 같다. 하다못해 어제 뭐했냐는 간단한 질문에도 솔직하게 대답하지 못한다. 알다시피 거짓말은 거짓말을 낳는다.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돌이킬 수 없다. 날 아껴주고 걱정해 주는 친구들 얼굴을 볼 때마다 마음이 무거웠다. 그래서 연애 3년 차쯤, 친한 친구들에게는 여자 친구의 존재를 알렸다. 가족이나 직장에서는 비밀이었지만, 친구들에게는 자꾸 거짓말하게 되는 상황이 싫어서 어느 날 술자리에서 고백했다. 


아, 곧바로 후회했다. 반응들이 장난이 아니었다. 장난을 가장한 비난이 쏟아졌다. 당시 40대에 접어든 내 친구들은 대부분 장가를 갔고 대부분 학부형이었다. 특히 딸 가진 친구들의 반응이 격했다. ‘어린애 데리고 장난하지 마라.’ ‘적당히 만나다 헤어져라.’ 순식간에 죽일 놈이 됐다. 이놈들한테 여자 친구를 인사시켜줬다간 좋은 꼴을 못 볼 거 같았다. 그나마 다행인 건, 내 얘기를 진지하게 들어준 친구도 딱 두 놈 있었다는 거다. 


내 상황은 그녀에 비하면 백배 나은 편이었다. 그녀에게는 나와의 연애가 세상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비밀이었다. 부모님과 가족들은 반대할 게 뻔했고, 교회나 학교 친구들에게도 비밀이었다. 나중에 알게 됐지만 그녀는 친한 친구한테까지도 비밀을 지키고 있었다. 


“‘나한테 자기가 소중한 사람이라서 그래요. 잘 알지도 못하면서 겉모습이나 나이와 조건만 보고 판단하고 비난하고, 그걸로 상처 주는 말 아무렇지 않게 내뱉는 게 싫었어요.” 


그녀의 말에는 오랜 고민의 흔적들이 담겨 있었다. 나이 차이를 꺼내는 순간 나는 ‘양심 없는 도둑놈’이고, 그녀는 ‘그의 능수능란함에 넘어간 순진한 어린양’으로 전락하고 말 것이라는 두려움. 나이 많은 남자를 만나면 스킨십의 진도를 빨리 뺀다는 수군거림. 이유 없는 폭력적인 시선. 대부분의 사람들은 서로 열심히 그린 라이트를 깜박거려서 연애가 성사되었을 가능성에 대해서는 일절 상상하지 않았다. 분명히 ‘내 감정과 선택이 반영된 관계’인데도 ‘나이 많은 남자의 트로피’가 된다고만 생각하는 게 싫다고도 했다. 그리고 


“자기가 이상한 사람으로 오해를 받는 것보다 더 싫은 건, 그걸 해명해야 한다는 거죠. 우리 사랑을 누군가에게 왜 해명을 해야 되나요?”


그동안 얼마나 많은 고민들을 해왔을지, 난 상상도 못 하고 있었다. 여자들은 연애하다 고민이 생기거나 트러블이 생기면 친구를 찾아 상담한다는데, 그런 호사는 그녀의 것이 아니었다. 혼자서 속앓이 하는 게 얼마나 힘겨운 일인지 난 그녀의 마음을 잘 알지 못했다. 그런 무심한 나에게 그녀는 언젠가부터 서운한 마음이 들었던 모양이다. 


“난 자기 한 사람 덕분에 행복해도, 속상해도, 고민이 생겨도 털어놓을 사람이 자기 한 사람밖에 없어. 그러니까 자기는 내 말 잘 들어줘야 해.”


난 왜 그녀의 말을 가만히 들어주는 것조차 못 했을까. 그녀가 원하는 건 단지 자신의 말에 귀 기울여주고 공감해 주는 것뿐인데. 나는 다시 한번, 그녀의 마음까지 헤아려주는 좋은 남자 친구가 되리라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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