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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훈훈하니 Mar 09. 2021

더 좋은 사람 1

you make me want to be a better man

내가 지금껏 들어본 가장 멋진 사랑 고백은 잭 니콜슨과 헬렌 헌트 주연의 영화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As good as it Gets)>에 나온다. 작가 멜빈(잭 니컬슨)은 강박증 증세가 있는 로맨스 소설 작가다. 뒤틀리고 냉소적인 성격인 멜빈은 다른 사람들의 삶을 경멸하며, 신랄하고 비열한 독설로 그들을 비꼰다. 그의 강박증 역시 유별나다. 길을 걸을 땐 보도블록의 틈을 밟지 않고, 사람들과 부딪히지 않으려고 뒤뚱뒤뚱거린다. 식당에 가면 언제나 똑같은 테이블에 앉고, 가지고 온 플라스틱 나이프와 포크로 식사를 한다. 이러한 신경질적인 성격 탓에 모두들 그를 꺼린다.


그런 그의 삶에 단골 식당의 웨이트리스 캐럴(헬렌 헌트)이 들어온다. 세상에 마음을 닫고 주변 사람들을 괴롭히기까지 하던 멜빈은 캐럴로 인해 타인에게 마음을 열고, 다가가 대화를 나누고, 어려운 사람을 이해하며 도와주는 노력을 기울이는 변화를 겪는다. 과거와는 다른 사람이 되어가는 것이다. 자신의 변화를 인지한 멜빈은 스스로도 뿌듯하고 기쁘고, 이 모든 변화가 캐럴 때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어느 날 멜빈은 캐럴에게 사랑을 고백한다.      


you make me want to be a better man.”

(“당신은 나를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게 합니다.”)

  

나는 사랑하는 당신을 위해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바람을 가지게 되었다는 고백. 이런 사랑 고백을 할 대상이 있다는 것도, 누군가 때문에 이런 소망을 가지게 된다는 것도 정말 멋진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나에게도 이런 ‘멋진 일’이 일어났다.


세상 그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비밀 연애’를 하고 있는 여자 친구. 혼자서만 속앓이 해야 하는 그녀를 위해 난 뭐든지 해주고 싶었다. 그래서 그녀를 위한 일이라면 최선을 다했다. 많은 시간 대화를 나누려고 노력했고, 업계 선배로서 일도 가르쳐 주려고 물심양면으로 노력했다. 하지만 잘하고 있다는 건 나만의 착각이었다. 그녀에게서 불만이 터져 나왔다.      


“나이 많다고, 사적인 것까지 가르치려고 들지 좀 마요.”      

잘 되라고 도와주고 있는데, 가르치려 든다고? 난 그녀의 말이 이해가 안 됐다.    

 

“알려주는 거잖아. 이렇게 해봐. 그게 너한테 좋아.”      

하지만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항변했다.      


“불이익이 와도 내가 감내할 테니까, 자기의 방식을 나한테 강요하지 말라고요.”      

어느새 내가 여자 친구에게 잔소리꾼이 돼 있다는 걸 난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인턴 과정을 마치고 정식 직원으로 입사한 그녀에게는 직속 사수 선배가 있었다. 하지만 난 그녀가 일을 잘하고 있는지, 무슨 일은 없는지 일일이 알아야만 직성이 풀렸다. 그래서 그녀의 모든 업무 결과물을 먼저 봤다. 그리고 누굴 인터뷰한다고 하면 ‘자료는 잘 준비했니?’ ‘뭘 물어볼 거니?’ ‘이건 꼭 질문에 넣어야 한다.’ ‘OO신문사 OOO기자 놈은 조심해라.’ 등등 나도 모르게 끝없는 참견과 잔소리를 하고 있었다. 첫마디는 꼭 ‘내가 해봐서 아는데.’였다. 나도 모르는 사이, 꼰대가 돼 있었다.      

꼰대는 기성세대나 선생, 늙은이를 칭하는 은어다. 여자 친구에게 내가 바로 그 꼰대질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최근 유행하는 꼰대 자가테스트를 해보면 당시의 나는 10점이 넘어가는 중증 꼰대였지만, 정작 나만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변명일 수도 있지만, 그때의 나의 행동은 모두 그녀를 위해서였다. 언젠간 내 곁을 떠나, 다른 곳에서 일하게 되더라도 잘한다는 소릴 들을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돕고 싶었다.


언젠가는 더 큰 조직의 일원으로서 큰 꿈을 펼칠 수 있기를 바랐다. 그러기 위해선 단단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방법이 잘못됐다는 걸 그때는 알지 못했다.      


부드러운 말투로 가장하고 있었지만, 난 은연중에 그녀를 나보다 한참 어리고, 내 말엔 무조건 따라야 하는 까마득한 후배로 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내가 자신을 가르치려 든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여자 친구가 지적하기 전까지, 나에게도 그런 습성들이 배어 있다는 걸 깨닫지 못했었다. 워낙 자연스럽고 익숙해 있었으니까.      


그때의 나는 전형적인 ‘구식 남자’였다. 내 성장기 또한 한몫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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