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의 나는 전형적인 ‘구식 남자’였다. 내 성장기 또한 한몫했던 것 같다. 우리 집은 엄격한 가부장적 규칙대로 움직였다. 아버지는 말이 없었고, 어머니는 남편과 아들 셋 뒷바라지만 하며 평생을 살았다. 남자가 오죽 못났으면 마누라한테 돈을 벌어오게 하느냐고 믿는 남편 덕분에 어머니의 바깥 활동은 꿈도 못 꿨다. 집안에서 아버지는 하늘, 그다음은 장남인 나였다.
동생들에게 나는 폭군처럼 군림했다. 동생들은 나에게 현관에 서서 90도로 인사를 했다.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학창 시절 새벽같이 등교를 하는데, 동생들은 자고 있는 게 아닌가. 그게 어찌나 분했던지 난 자고 있는 두 동생들을 패주 기도 했다. 동생들은 김치만 먹고, 나에겐 계란말이가 주어지고, 동생들은 고무신을 신을 때, 난 구두를 신을 수 있었다. 심부름 같은 건 언제나 동생들 몫이었다. 장남 특권으로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성장했다. 동생들에겐 내 말이 곧 법이었다.
그런데 그녀와 연애를 하면서 문제점들이 드러났다. 나는 도통 소통하는 법을 모르는 남자였다. 그래도 가족 안에서는 별 문제가 없었다. 내가 소통을 하지 않고 내 뜻대로 일을 밀어붙일 때, 부모님, 특히 엄마, 그리고 동생들이 내 기분을 살피고 알아서 나한테 맞춰줬기 때문이다. 나는 소통이 부족했음에도 그로 인한 불이익을 받지 않았고, 부모님에게 사랑받기 위해 애써 심부름이나 애정표현을 하지 않아도 됐었다.
당시의 나의 대화법은 이런 식이었다. ‘내가 신입일 땐 말이야∼’로 말문을 열고, 무용담 같은 경험들을 쏟아냈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전형적인 ‘꼰대 식 화법’이었다. 꼰대 화법에서 벗어나 타인과 제대로 된 소통을 하는 것, 그게 내 앞에 놓인 과제였다.
더 힘든 건, 내가 꼰대라는 걸 인정하는 것이었다. 누구도 꼰대가 되고 싶지 않다. 역설적이게도 꼰대가 되지 않으려면 내가 꼰대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내로남불(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말이 있다. 남이 하면 꼰대질이지만 내가 하면 꼰대질이 아니라 애정이고 충고라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자신보다 약하다거나 어리다는 마음이 내재돼 있는 상대와 말을 섞는다면 더욱 조심해야 한다. 아무리 좋은 의도라도 상대가 꼰대질로 느끼면 꼰대질 밖에 되질 않으니까.
그녀에게 지적과 팩폭을 당하면서, 내 주장만 하는 나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인정하기 싫었고, 인정하기까지 시간이 걸렸지만, 내가 ‘내 말만 옳다고 우기는 꼰대’라는 사실을 인정하게 됐다. 틀림이 아니라 다르다는 걸 인정하고, 틀린 건 빨리 수긍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고 옳고 그름을 판단해 주는 게 아니라, 가만히 그녀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한다는 걸 마음에 새기며 실천해야 한다.
또 하나 벗어나야 할 것은 ‘허벌촐남’이다. ‘허벌촐남’은 그녀가 나에게 붙여준 별명이다. 허둥대고, 벌떡벌떡 화를 잘 내고, 촐랑거린다는 뜻이다. 이 별명을 처음 들었을 때, 그녀가 내 성격을 완전히 꿰뚫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깜짝 놀랐다. 역시 그녀는 예리하다. 앞에서도 몇 번 얘길 했지만, 난 진중, 차분 이런 단어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다.
지금은 진상과 컴플레인의 차이를 잘 구분할 수 있게 되었지만, 과거에는 아슬아슬하게 경계를 오갔었다. 식당에서의 단골 대사는 직원 교육 어떻게 시킨 겁니까. 이유인 즉, 우리가 먼저 시켰는데 옆자리 음식이 먼저 나왔거나, 엉뚱한 메뉴를 가져다줬거나 한 경우다. 난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항의할 건 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보통은 좋은 말투로 컴플레인을 하지만, 목소리가 높아질 때도 있었다. 그녀는 달랐다. 굳이 남들의 눈총을 사가며 기분 망치고 싶지 않다고 했다. 그러면서 별거 아닌 일에 화내지 말라고, 그 종업원이 일부러 그랬겠냐고. 그리고 자기가 종업원이면 기분이 좋겠냐고.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함께 대만 여행을 갔는데, 물론 빚 청산 후에 떠난 여행이다, 내가 허둥대느라 여권이 든 배낭을 잃어버린 일이 있었다. 호텔에서 운영하는 공항 셔틀버스에 두고 내린 것인데 나는 손님 물건이 있는지 확인 안 하고 출발해 버린 호텔 측에 항의를 했다. 내 모습에 그녀가 나에게 핀잔을 줬다. 난 화를 참지 못 하고, 왜 나한테만 뭐라고 하냐며 호텔에 그녀 혼자 두고 밖으로 나와 버렸다. 다행히 셔틀버스가 공항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배낭은 다시 찾을 수 있었다.
나 혼자 밖으로 돌아다니다 한참 후에 호텔로 돌아와서는 그녀에게 사과를 했다. 당황하고 흥분된 상태라 나도 모르게 큰소리를 냈다고. 그녀는 내 사과를 그 자리에서 받아줬다. 잘못했다고 인정하면, 아내는 사과를 잘 받아줬다. 그러더니, 그녀 입장에서 기분이 나빴던 것 하나하나를 나에게 설명했다. 우리가 묵을 숙소에 있는 사람하고 왜 얼굴을 붉혀야 하느냐. 차분히 기다리면 해결됐을 일인데 왜 흥분부터 해서 여행 온 기분을 망쳐 놓느냐.
처음에는 ‘미안하니까 그만해.’ 이렇게 말했었던 나. 나중에는 ‘내가 차분하지 못하고, 화부터 내서, 자기 기분까지 망치게 해서 미안해.’ 이런 식으로 사과하는 방식도 바뀌게 되었다. 그녀가 지어준 ‘허벌촐남’이라는 별명에는 당황스러운 순간에 침착하지 못하다고, 나이 값 못한다고, 의연하게 대처하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는 의미가 담겨 있었음을 차차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어느새 나는 한국 나이로 ‘반백살’이 되었다. 세상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는다는 불혹(不惑)도 지났고, 입시, 취업, 결혼 등의 과업을 이겨내며, 하늘의 뜻을 알게 된다는 지천명(知天命)에 이르게 된 것이다. 내가 언제 이렇게 나이를 먹었지? 반백살의 나이가 아찔하게 다가올 때도 있지만, 왜 50살을 지천명이라 부르는지 그 이유를 조금은 알 것도 같다. 조바심 나서 성급하게 화낸다고 달라지는 건 없더라. 이제는 기다려주고, 다른 사람 입장에서 세상을 보려는 포용력이 조금은 생긴 것 같다. 그녀가 나에게 남겨준 또 다른 선물이기도 하다. 지나고 보니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