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적 해방과 교사
지난겨울에 대학원이 시작되기 전, 강의 계획서에 추천도서로 되어있던 책이다. 사실 대학원 학기가 끝날 때까지는 읽지 못했고, 학기를 마치고 나서야 읽기 시작했다.
제목부터 뭔가 역설적이다. 스승이라면 무언가를 알고 있고 나에게 가르침을 주어야 하는데 무지하다니. 그런데 이상하게도 제목을 보니 스승과 교사가 주는 어감 차이가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
첫째로 스승이 무지한 것은 별 거부감이 없었는데, 무지한 교사라고 하니 '교사가 무지하면 안 되지'라는 생각이 든다. 무지한 스승에게는 배울 수 있는 데 무지한 교사로부터는 배울 것이 없는 느낌이랄까?
둘째로 스승에게는 인생에 관한 전반적인 것을 배우지만 교사로부터는 체계화된 지식을 전달받는 느낌이 들었다. 스승은 뒷짐을 지고 내가 하는 것을 지켜보며 시기적절할 때 좋은 의견을 주는 사람, 교사는 내가 어떤 일을 하기 전부터 걱정이 앞서 나에게 모든 것을 알려주고 시작하게 하려는 사람.
셋째로 스승은 나와 인간적으로 교감을 맺고 인연을 이어가는 사람, 교사는 특정 시간과 장소에서 나의 흥미와는 관계없이 정해진 것을 가르쳐야 하는 사람.
교사라는 단어가 너무 부정적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어느 한 가지만 진리일 수는 없다. '스승'과 '교사'는 섞여야 한다.
어쨌든 이 제목이 무지한 스승이 아니라 무지한 교사였다면 책의 매력은 반감되었으리라 생각하면서 책을 펼쳤다.
이 책은 자코토라는 교수의 사례에서 시작한다. 자코토는 말이 통하지 않는 곳에서 프랑스어를 가르치게 되었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학생들에게 프랑스어를 '설명'해주는 것이 아니라, 학생들이 프랑스어로 된 책을 읽고 '탐구'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뿐이었다. 놀랍게도 그의 학생들은 더듬더듬 프랑스어를 읽어나갔고, 얼마 후에는 학생들의 수준이 눈에 띄게 높아졌다.
랑시에르는 자신이 하고자 하는 말을 '설명'과 '해방'의 대조로 풀어나간다. '설명의 교육'에는 교수자와 학생 사이의 지식의 불평등이 전제되어 있다. 설명의 교육은 지식의 위계에 맞게 상위 지식까지 모두 이해한 사람에 의해 하위 지식을 전달받는 것이다. 이러한 설명의 교육은 설명받는 학생이 스스로 지식을 창출하지 못하게 하고, 새로운 것을 습득하는데 보다 높은 권위에 의존하게 한다. 설명의 방식은 그 지식과 학생을 단절시켜 죽어있는 지식이 되고, 학생에게 피상적이고 간접적인 지식이 된다.
반면 해방의 교육은 지적인 평등을 전제로 한다. 해방의 교육은 학생과 교사의 지적 차이는 인정하지만 교사가 알고 있는 것, 그리고 다른 사람이 알고 있는 것은 모든 학생도 알 수 있고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교육이다. 해방의 교육에서는 교수자에 의존하는 학생이 아니라, 자신의 의지로 배움을 이어나가는 학생이 있으며, 이러한 해방에서 지식과 학생은 서로 연결되어 있고 배움에 활력이 생기며 창의성이 발휘된다.
랑시에르는 지적 해방에 관해 이렇게 설명했다.
해방이란 모든 인간이 자기가 가진 지적 주체로서의 본성을 의식하는 것이다.
본문 33p
지적 해방이라고 하니 '지식적인' 측면에만 국한되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지적 해방은 단순히 지식을 많이 아는 것보다는 더 넓은 의미를 가진다. 쉽게 말해 지적 해방은
모든 인간의 지적 능력이 평등함을 알고, 자신의 가능성을 깨달아 어디서든 당당하게 자신의 주관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는 것
이라 할 수 있다.
보통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 또는 성공을 거둔 사람들, 학력이 높은 사람들과 대화할 때면 무언가 위축되는 기분을 느낀다. 그 사람의 말이 맞는 것 같고, 그 사람들의 의견이 더 옳은 느낌을 받으며 그들의 의견과 생각에 나를 맞춰간다면? 당신은 지적으로 해방되지 못한 것이다. 주체적으로 살지 못하는 것이다.
또한 어떤 주제에 대해 자신만의 의견이 아니라 (다시 한번 생각해보라, 정말 당신의 의견인가? 어느 정도로 당신의 의견인가?) 여론 또는 다른 사람의 말만 믿고 있다면? 당신은 지적으로 해방되지 못했다.
랑시에르는 지적 해방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해방의 교육을 통해 지적 해방을 성취한 사람이라면 보편적 가르침을 통해 지식이 없더라도 스승이 되어 지적 해방의
고리를 이어가야 한다. 지적 해방을 통해 얻어진 보편적 가르침은 다음과 같다.
무언가를 배워라, 그리고 그것을 이 원리, 즉 모든 인간은 평등한 지능을 갖는다는 원리에 따라 나머지 모든 것과 연결하라
본문 40p
쉽게 말하면, 글자를 발명한 사람의 지능이나, 숫자를 발명한 사람의 지능 그리고 교과서에 나오는 유명한 과학자나 학자들의 지능과 우리의 지능은 같다. 이러한 인간의 지적 평등을 깨닫는 지적 해방이 우선이다.
그리고 지적 해방을 얻는 매개체는 무궁무진하다. 어떤 사람은 수학을 통해, 어떤 사람은 역사를 공부하면서 지적 해방이 일어난다. 또한 꼭 글로 하는 공부가 아니라 생활의 경험 속에서도 지적 해방은 일어날 수 있다. 이렇게 어떤 방식으로든 지적으로 해방되었다면 당신은 이제 세상 모든 것의 사물과 지식들을 하나의 고리로 엮어가며 당신만의 삶을 만들어가야 한다.
랑시에르는 지적 해방을 깨닫게 된다면, 자신과 관련되어 있지 않고 생소한 것들이라도 배우고, 가르칠 수 있다고 한다. 자신이 잘 모르는 것을 배울 수 있다는 것은 이해가 가지만, 도대체 어떻게 모르는 것을 가르친다는 말인가?
무지한 스승이 그의 학생에게 요청해야 하는 것은 자신이 주의 깊게 공부했음을 스승에게 증명해야 한다는 것이다.
랑시에르는 학생과 교수자의 연결을 두 가지로 나눈다. 첫째는 의지의 연결이고 둘째는 지적 연결이다. 우리는 이 중 의지의 연결을 통해 모르는 것도 가르칠 수 있다. 정확히 말하자면 학생이 모르는 것을 배워나가게 할 수 있다. 의지가 있는 학생이 어느 정도로 나아갈지, 그 길로 꾸준히 갈 수 있도록 학생의 의지만 구속하는 방식으로 모르는 것을 가르칠 수 있다고 말한다.
어찌 되었든 중요한 것은 가르치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자신부터 지적 해방을 이루어야 한다. 특히 현대의 교사들 중에는 지적 해방을 이루지 못한 교사들이 많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교사들은 근대식으로 설명 위주의 강의를 듣고 자라왔으며, 더군다나 정답을 맞혀야 하는 시험 점수를 얻어 교사가 되었다. 교사가 되기까지 우리는 나의 창의성, 지적 호기심을 해결하는 경험과 과정보다는 한 문제라도 더 맞힐 수 있는 시험 기술과, 한 번이라도 더 시험에 나올 것 같은 지식을 암기하는 데 몰두해왔다. 즉 우리는 설명의 교육에 너무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지적 해방을 이룰 수 있는 기회 자체가 적었다. 하지만 지금, 교사들도 자신이 지적 해방을 이루었는지 잘 반성해보고, 지적 해방을 이루어야 한다.
교사들이 암만 지적 해방을 이루었다고 해도, 현재 공교육에서 '해방의 교육'은 이루어질 수 있을까? 여러 현실적인 점을 고려할 때 설명의 교육을 완전히 버릴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된다. 설명의 교육 또한 그 나름의 장점이 분명히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해방의 교육'을 모든 학교와 교사에 강요하는 순간, 해방의 교육이 가지는 그 의미와 묘미도 사라지게 된다. 더 나아가 해방의 교육 자체가 하나의 '위계'와 '설명'으로 퇴색될 것이다. 그렇기 랑시에르 본인도 해방의 교육은 국가 교육의 목표로 세워질 수는 없다고 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교사들은 지적 해방을 이룬 후 어떻게 해방의 교육을 교실에서 실천할 수 있을까? 지적으로 해방된 교사들은 어떻게 교육을 해나갈까?
첫째로, 학생과 지적 수평 관계에서 생각할 것이다. 설명하는 교사는 학생이 교사의 설명을 듣고, 그것대로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해방시키는 교사는 어떻게 하면 학생이 이 주제에 대해 스스로 생각하게 할 수 있을지를 생각한다. 이러한 생각을 바탕으로 학생의 다양한 반응을 자신의 의도와 연결해가며 설명한다.
둘째로, 지식의 배경과 본질을 생각하며 가르칠 것이다. '설명의 교육'으로 가르치는 교사는 교육과정에서 주어진 대로 가르친다. 그렇기에 교육 내용이 교사로부터 학생에게 전달되는 동안 단절되어 제대로 전달될 수 없다. 하지만 해방의 교사는 왜 학생들이 그 지식을 배워야 하는지, 그 지식은 어떤 맥락에서 정립되었으며 인간 생활에 적용되어 왔는지를 생생하게 전달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셋째로 교육과정에 제시된 성취기준과 내용을 바탕으로 학생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접근하고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줄 것이다.
넷째로 지적 평등의 사상을 바탕으로 교사 자신의 삶 속에서 여러 가지를 끊임없이 배워나가며 자신만의 세계를 창조해나갈 것이다. 그리고 이를 통해 자신만의 삶과 수업을 만들어나가는 예술가와 같은 교사의 모습을 완성해나갈 것이다.
랑시에르가 말하는 지적 해방을 이룬 사람은 니체가 새로운 인간상으로 제시한 (위버멘쉬(초인))와 상당히 유사하다. 그리고 이 책에 깔린 전반적인 인상 또한 니체 철학의 향기를 진하게 풍기고 있다.
니체의 위버멘쉬는 그 의미적으로 훨씬 복잡한 내용을 담고 있지만 간단히 말하면 '지적 해방을 이룬 사람'이 바로 초인이라고 생각해도 무리가 없으리라 생각한다. 관습, 구시대적 도덕, 여론에 매몰되어 자신만의 삶을 창조 해나가지 못하는 종말인과 달리 초인은 하나의 삶을 창조해나가는 예술가이다. 어느 하나 확실한 진리라고 할만한 것이 없는 세계 속에서 허무주의에 빠지지 않고 자신만의 깃발을 높이 들고 삶을 이끌어 나갈 수 있는 용기 있는 자이다.
이런 맥락에서 지적 해방을 이룬 교사는 위버멘쉬로서의 교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위버멘쉬로서의 교사라면 위의 지적 해방을 이룬 교사보다 몇 가지 점이 다를 것이다.
위버멘쉬로서의 교사는 교육적 허무주의에 빠지지 않을 것이다. 교사의 삶 속에는 교육적 허무주의에 빠지게 할 요소들이 너무나도 많다. 허무주의에 빠진다면 어느새 활력 없이 주어진 내용을 전달만 하거나 형식적인 수업만을 하게 된다. 반면 위버멘쉬로서의 교사는 자신의 교직 생활에서 주어진 것들에 적당히 의미를 부여해나가며 자신의 교직 생활을 창조해나가는 교사이다.
또한 관습에 얽매이지 않고 상식적인 선에서 자신이 생각하는 교육적 활동이 무엇인지 생각하고, 자신만의 교육관과 신념을 만들어가며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는 교사이다.
이 책에서 나의 생각을 잠시 머물게 만들었던 구절들을 끝으로 마무리하고자 한다.
"새로운 관계를 발견하고 조합하기 위해 의지가 지능에 전달하는 에너지가 더 크냐 작으냐에 따라서 지능의 발현들에 불편 등이 있다. 그러나 지적 능력의 위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61p)"
"각자 행위하고, 자신이 한 것에 대해 이야기하고, 자신의 행위의 실제성을 입증하는 수단을 제공하는 곳에 지능이 있다 (70p)
"중요한 것은 경계를 지속하기, 무분별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를 결코 느슨히 하지 않기이다. 스승이란 구하는 자를 그의 길에 붙들어 두는 자이다. (72p)"
"유일한 잘못이 있다면 우리의 의견을 진리로 간주하는 것일 테다 (94p)"
" 나는 한 사람의 능력이 다른 사람의 능력보다 열등하다고 말하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그저 능력이 똑같이 발휘되지는 않았다고 가정할 것이다.(102p)
"하지만 위대한 화가 만들기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해방된 자 만들기, '그래, 나도 화가다'라고 말할 수 있는 인간 만들기가 중요하다. "(131p)
"지배에는 어떤 자연적 근거도 없다 (167p)"
"인간 사회에서는 어느 누구도 제자리에 있지 않다. 왜냐하면 다르지 않은 존재들에게 다른 자리가 주어져있기 때문이다.(168p)"
"불평등한 사회에서 평등한 인간들이 되는 것을 배우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스스로 해방된다는 말이 뜻하는 바이다.(246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