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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니쌤 Feb 11. 2023

[북 리뷰] 우리 교육기관의 미래에 대하여-니체

오늘날의 교육문제와 니체의 경쟁(agon) 개념


 


교육은 사회의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이다. 그렇기에 교육에 대한 수많은 관점과 논쟁은 꾸준히 존재했다.


 철학자로 알려진 프리드리히 니체 또한 교육에 대한 자신의 관점을 정리했다.

바로 <우리 교육기관의 미래>이다.


 니체는 자신의 철학을 완성시키기 전에 바젤대학의 교수로서 교육에 종사한 교육자였다.

기록에 따르면 니체는 가르치는 일을 꽤나 즐겼다고 한다.


 결정적으로 그는 1872년 1월부터 3월까지 5차례의 강연을 통해 독일교육의 문제점에 대해 지적한다.

교육학을 연구하거나, 뚜렷한 교육학 저서를 집필하지는 않았으나 니체는 이미 교육에 대한 생각,

즉 교육철학을 가지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교육에 대한 니체의 강연은 그저 교육 철학에 그치지 않고 추후 '차라투스트라'로 대표되는 그의 사상과 새로운 저서를 집필하는 데 밑바탕이 되었을 것이다.


 니체는 강연에서 19세기말 당시의 독일 교육이 가진 문제점에 대해 지적한다.

100년도 넘은 이야기지만 강연의 내용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현대의 교육이 보여주는 문제점과 놀라울 정도로 일맥상통한다.


  당시 교육 문제와 현재의 교육문제가 비슷한 이유는, 어쨌든 자본주의와와 민주주의를 바탕으로 한 사회에서 일어날 수밖에 없는 문제일 거라 생각한다. 우리 사회는 100년간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에 더 익숙해졌다. 그렇기에 어쩌면 100년 전 니체의 교육 문제에 대한 지적은 100년 동안 수정되고 보완되었다기보다는 그 시간만큼 더 곪고 고착화되었을지도 모른다.


 민주주의 안에서 살아온 우리 눈에 '귀족적 급진주의'라 평가받은 니체의 말이 아주 악의적이고 비도덕적으로 보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무언가에 대한 '맹신'을 일관성 있게 비판해 오던 니체의 시각은 우리 사회의 현실에 대해 돌아볼 수 있는 기회를 줄 수 있다.



        니체, <평준화 교육에 반대하다 저자>프리드리히 니체, 출판: 부글북스 발매: 2016.12.15.


 이 책의 제목을 본 순간 나는 이번 리뷰에 대해 반드시 이 강연 안에 담겨 있는 니체의 사상들을 먼저 소개하고 리뷰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이 책의 제목 자체가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그 맥락을 이해하지 않으면 니체라는 사람에 대한 오해가 훨씬 커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번 포스팅에서는 책 내용의 이해에 바탕이 되는 "니체가 바라보는 고대 그리스 정신 - '자유주의 교육'과 '경쟁(agon)'의 관점"을 위주로 살펴보려고 한다. 니체는 과연 어떤 생각을 가지고 교육의 어떤 문제점을 지적했을지 살펴보자.


오늘날 교육에서 경쟁 개념의 필요성.


 현대는 민주주의, 평등의 가치를 따르는 사회이다. 동시에 우리 사회는 자본주의와 능력주의 아래에서도 살고 있다. 평등과 경쟁이라는 절대 어울릴 수 없는 이러한 사회 상황에서 우리는 많은 혼란을 겪는다. 평등과 경쟁의 공존이 야기하는 혼란이 가장 큰 곳은 바로 '교육'이다.


 교육은 우리 사회에서 '공정한 출발선'을 실현할 수 있는 가장 쉽고, 합리적이며 거의 유일한 방법이다. 대중은 평등한 공교육을 통해 이미 세습되고 고착화된 사회적 계층을 이동할 수 있는 희망을 가졌다. 이에 따라 사람들은 공교육을 확대하며 계층 상승을 실현하길 요구했다. 하지만 계층 상승에 대한 낙관주의로 인해 이미 내재된 사회적, 경제적 불평등으로 인해 개인 간 교육의 수준은 같을 수가 없다는 현실은  보이지 않았다.


 이렇게 시작된 공교육은 항상 평등과 경쟁의 양방에서 공격을 받는다. '왜 공교육이 사교육을 이길 수 없느냐', '공교육의 질이 왜 떨어지느냐'는가 하면 '왜 학교를 경쟁의 장으로 만드느냐', '학교는 민주주의 가치와 평등을 실현하는 작은 사회다'라는 반대편의 요구도 만만치 않다.


 경쟁과 평등의 모순은 우리 사회 공교육에 있어서 매우 첨예한 대립을 하고 있다. 결국 대중들이 원하는 '교육의 질'은 더 좋은 대학, 더 좋은 직업을 얻어서 사회적 계층 이동을 가능케 할 수 있는 직업이다. 이는 결국 좋은 대학에 보내는 데 공교육은 쓸모가 없다는 비판이다.


 하지만 좋은 대학에 가려면 점수가 높아야 하고, 높은 점수를 얻는다는 것은 '강압, 훈육, 지도, 복종'이 내재되어 있다. 왜냐하면 개체 간의 경쟁에서 승리해야만 계층 이동을 할 수 있고,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이런 것들이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위에서 말한 '교육의 질'을 높이면 '민주적 요소들'이 나타나 가로막는다. '인권, 평등, 조화, 협동' 이런 것들 말이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을 거쳐오면서 이제 공교육에서 '경쟁'은 아주 적대적인 단어가 되어버렸다. 특히 최근에는 인권이 신장되고 사회적으로 범죄, 치안, 학교 폭력 등 많은 문제들의 주범이 '경쟁을 위한 교육', '인성 교육의 부재'로 낙인찍힌 이후 어느새 공교육은 '인성 교육', '보육'의 의미로 전락하고 말았다. 학교와 교사 개인의 입장에서도 굳이 열심히 했다가 어느 순간 문제가 될지 모르기 때문에 최대한 몸을 사리는 것이다.


 현대 사회에서 공교육의 위상을 살린다며 여러 가지 대책을 내놓았지만 대부분 실패하고 말았다. 대부분 실패한 이유는 공교육의 기능을 '평등'에만 맞추었기 때문이다. 수시 전형 다양화, 입학사정관제, 다양한 특별 전형, 대학교의 수 확대 등 '최대 다수에 대한 보편 교육'에만 치중한 나머지 우리는 교육의 본질적인 경쟁 요소를 최대한 없애려고 했다.


 이렇게 '평등'에 치우친 교육은 개인의 욕망과 승부욕을 억누르는 반자연적 교육이다. 이러한 교육은 결국 개인을 본성을 약화시키며 언제든 대체할 수 있는 사회의 부속품 중 하나로 만들 뿐이다. 이런 개인들이 모여있는 공동체는 더 이상 문화의 발전을 기대할 수 없는 '근대적'인 교육일 뿐이다.


 앞에서 열거했던 평등에 대한 집착은 더 이상 우리 공교육을 발전시킬 수 없으며, 더 나아가 우리 사회를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어 갈 수 없음을 우리는 깨달았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달라지기 매우 힘든 문제이다.


이런 상황에서 니체가 통찰했던 고대 그리스 사회의 경쟁, Agon의 개념은 현대 우리 교육에 대한 시사점을 줄 수 있다.


니체에게 '고대 그리스란?'



 니체는 첫 출간작인 '비극의 탄생'부터 마지막에 이르기까지 '그리스 정신' 특히 '디오니소스의 정신'을 이상화한다. 나는 니체를 접한 초반부터 궁금했다.


 도대체 니체는 왜 유독 '그리스 정신'을 갈망했는가?


 이에 답하기 위해서는 먼저 당시 유럽의 상황을 대강이라도 알고 있어야 한다. 니체가 살던 유럽의 19세기 초는 그야말로 대혼돈의 시기였다.


 14~16세기에 걸쳐 서유럽 지역에는 르네상스, 인문주의가 나타났다. 인문주의의 영향 아래 인간을 중심에 두고 문화 발전을 이루었던 '고대 그리스'의 철학, 문학, 예술에 큰 관심을 가졌다. 하지만 독일이 있는 북쪽 지역에는 이런 움직임이 매우 늦게 전파되었다. 이때 르네상스의 예술가들은 특히 조각에서 순백의 대리석으로 만든 조각이 가장 그리스적인 조각이라는 생각을 했다.


미켈란젤로, <피에타.> 이런 순백의 조각상은 추후 인종차별의 근거가 되기도 했다.


 니체가 살던 19세기 독일에서도 여전히 고대 그리스는 하나의 이상적인 사회로 인식되었다. 당시 고대 그리스에 대한 이미지는 매우 깨끗하고, 순결하고, 고귀한 이미지였다. 이러한 이미지는 미술사학자인 '빙켈만'의 그리스 인식에 잘 나타나있다. 빙켈만은  '고귀한 단순성과 고요한 위대성'(Edle Einfalt und stille Größe)이라는 유명한 정의를 통해 고대 그리스 세계를 이 지상에서 완성된 정말 무결한 인간상으로 만들어 냈다.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빙켈만에 의해 만들어진 고대 그리스 이미지 이야기



<바쿠스>, 미켈란젤로 다 카라바조, 술과 생명력 그리고 광기의 신이다.

 하지만 니체는 당시 다양한 학자들과의 만남 통해 고대 그리스에 대해 새로운 지평이 생겼다. 그는 처녀작 <비극의 탄생>에서 그리스의 경쟁, 잔인함, 광기 등의 이미지를 제시하여 이를 바탕으로 빙켈만의 고대 그리스 이미지를 산산이 부숴버렸다. 그 결과 당시 학계로부터 많은 비난을 받고 문헌학자로서의 지위를 거의 상실하였다.  



니체가 어떤 경우에도 포기하지 않고 계속 견지했던 사유로서 고대 그리스인들의 경쟁적 시합은 다른 사람들보다 뛰어나고자 하는 개체의 투쟁, 즉 고귀한 개체의 투쟁이다.


뛰어남을 추구하는 경쟁, 이것이 그리스인들을 그들의 그 어떤 적수보다 우세하게 만들고, 그들의 문화를 '위대함'의 경지로 고양했던 것이다.


책 세상, <니체 입문> 189p






 특히 니체는 '경쟁'을 고대 그리스 사회의 필수불가결한 요소로 생각했다. 때로는 자신의 목숨을 위험하게 만들 수도 있지만 고대 그리스인들은 경쟁을 통해 찬란한 문화를 꽃피운 것이다.


아래의 영상을 보면 알겠지만 원조 올림픽 경기는 현대인이 보기에 매우 야만적이고 치열했다.


고대 그리스의 올림픽 경기 -쏨 작가의 지식사전


 니체가 생각했을 때, 경쟁은 고대 그리스인에게 필연적인 요소였으며, 올림픽 경기뿐 아니라 비극 경연대회 등의 형식을 통해 경쟁심을 건전한 방식으로 풀어냈다.


   니체가 보았을 때 당시 독일의 교육은 민족과 인류의 정신을 위축시키는 교육이었다. 교육의 속물화, 교육기관의 확대(교육 기관 수와 교원의 수 증대)는 교육과 교사의 질을 하락시킬 뿐이었다. 뿐만 아니라 학생의 지나친 자율권 보장도 학생에게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교육이라고 하였다.


 니체가 말한 교육의 문제는, 120여 년이 지난 지금의 우리나라 교육과 매우 흡사한 모습이다. 따라서 그의 시선으로 오늘날의 교육 사태를 바라보면 교육의 여러 문제가 저절로 떠오른다. 특히 위에서 말한 것처럼 '경쟁'에 대한 병적인 거부, 맹목적 거부와 동시에 '평등'에 대한 신념, 믿음 등이 교육과 우리 아이들 더 나아가 우리 사회 전반을 병들게 하지 않았는지는 살펴봐야 한다.


니체의 '자유주의 교육'과 '경쟁(agon)' 개념.


 니체를 교육적으로 바라볼 때 추구하는 인간상을 설정한다면 당연히 '위버멘쉬'가 가장 먼저 떠오를 것이다. 그러나 니체는 이 저작에서 교육의 목표가 '천재' 양성임을 명확히 한다. 니체가 말하는 천재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천재는 아니다. 한 분야에서 독창적인 성과를 올리거나, 뛰어난 능력을 보여주는 사람이 아니다.


 엄인주의 연구(2017)에 따르면 니체가 생각하는 천재는 '총체적 인간'이다. 이는 고대 그리스의 자유인들의 모습과 교육에서 떠올린 것으로 보인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노예제도를 바탕으로 생겨난 시간에 여가(schole)를 실천하며, 생존문제에서 벗어나 삶의 의미를 탐색하는 '자유교육'을 펼쳤다. 그러므로 고대 그리스인에게 학문과 지식 등은 삶과 그대로 연결되었다. 그리고 각각을 독립적으로 탐구하는 것이 아니라 총체적인 관점, 전인적인 관점에서 바라보았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지식과 삶은 점차 유리(遊離)되어 갔다. 지식은 점점 쌓여갔고, 심지어 학자들 조차 학문은 그 지식들을 정리하느라 삶을 외면했다. 그 결과 교육은 학문적으로 정리된 언어의 전달에 그쳤다. 게다가 속물화된 교육은 경제 논리에 휩싸여 학생들을 속물화시키고, 그 결과 학생들은 학교에서 노동의 예비 과정을 준비하는 것 마냥 내던져졌다.


 앞서 말한 대로 니체는 고대 그리스의 새로운 면을 꿰뚫어 보면서도 당시 혼란한 유럽이 나아가야 할 이상적 모델을 고대 그리스 사회로 규정하였다. 그렇기에 <우리 교육기관의 미래에 대하여> 강연은 전반적으로 앞서 말한 고대 그리스의 자유 교육을 모티브로 삼았다.


 이러한 점을 미루어 볼 때 니체가 생각했던 교육에서 '경쟁'은 빠질 수 없는 요소이다. 현대의 '경쟁'은 교육에 있어 매우 부정적 의미를 띠는 것과는 반대이다. 하지만 니체가 바라보았던 고대 그리스의 '경쟁'은 필연적인 삶의 일부이자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으로 발휘할 수 있는 하나의 동력이었다.


 본래 아곤은 인간의 자연적 본성을 가장 최고의 힘을 가진 자로 키워내는 교육학적 개념이다.(강용수. (2020). 니체의 우정의 정치학 - 아곤(agon) 개념을 중심으로. 니체연구,  38, 7-36.) 따라서 경쟁을 교육에 적대적인 요인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아곤'의 개념으로 본다면 교육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사점을 얻을 수 있다.


  정낙림(2018)은 니체의 '아곤 교육'을 인성교육과 연관 짓는다. 니체가 발견한 이곤적 사유가 교육에서 자연성 즉 '힘에의 의지' 촉진하며, 제2의 천재를 양성하여 공동체의 유익함을 추구할 수 있으며, 개인을 최고조로 상승시킴으로써 근대적 '국민 교육'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다고 말한다. 특히 자본주의의 승자독식주의와 아곤의 공동체적 유익성을 강조한다.


 니체는 삶에 있어서도 항상 가까운 친구들과도 토론, 논쟁 등의 경쟁을 했으나 그것은 악의적인 경쟁이 아니었다. 니체의 우정은 '친분'과 '적대'를 구분 짓는 기준이 아니라 서로의 경쟁을 통해서 자기를 완성해 나가는 과정이자 수단이었다. 니체는 고독을 즐겼지만, 항상 홀로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친구와 함께 클럽을 만들어 여러 창작물을 나누었고, 특히 트립쉔에서 나눈 바그너와의 우정은 둘의 관계가 끊어진 이후에도 "별들의 우정"으로 남기며 니체 사상의 발전에 큰 영향을 주었다.


 우리는 자유 교육과 경쟁(agon)을 보며, 적당히 조절된 경쟁을 통해 공교육에서도 자유인을 양성할 수 있음을 기대할 수 있다.



교육기관의 두 가지 종류: 기본 교육과 고등 교육



 * 기본 교육과 고등 교육


 니체는 반민주, 반평준화 교육을 주장한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는 니체가 강연에서 이야기하는 교육의 성격에 대한 확실한 구분이 없기 때문에 나온 말이라고 생각한다. 이 강의에서 니체가 주로 비판하는 대상은 기초교육이 아니라 고등교육에 대한 문제이다.


 우리나라에서 기본 교육은 국민공통교육과정으로 초1~고1로 정해져 있다.

기초 교육 또는 기본교육은 글자와 숫자교육, 기초 문해교육, 도덕 교육 등 기본 소양 교육과 실용교육이라고 할 수 있다.


기초교육의 목적은 사회에서 인간이 살아가기 위한 최소한의 생존과 연결되는 '자본주의적 교육'이라고 할 수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기초 교육을 받지 못한다면 사회에서 기본적인 생존의 위기에 봉착한다.

예를 들어 글자와 숫자를 모르거나, 기술이 없는 사람이라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최소한의 생존을 위한 직업을 얻지 못할 것이다. 따라서 기초교육은 아주 평등하고 민주적으로, 나이를 떠나 모든 국민에게 이루어져야 할 교육이다.

 

니체는 <우리 교육기관의 미래에 대하여>라는 강연에서 이러한 기본 교육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기본교육이 아예 직업 자체를 배우는 직업 교육은 아니다. 자본주의와 직업에 대해 어느 정도의 거리를 두고, 다양한 교과의 내용과 기본 지식들을 습득하는 과정에서도 충분히 총체적이고 전인적인 인간을 길러낼 여력은 있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고등 교육은 위에서 말한 고대 그리스의 교육과 같이 생존의 문제와는 별개이다.


고등 교육의 목적은 '진정한 교양인'을 양성하는 교육이다. 위에서 말한 '자유주의 교육' 즉, 총체적이고 전인적인 사유를 할 수 있는 인간 양성에 있다. 생계를 넘어서 철학적, 사상적, 예술적으로 문화를 더욱 고양시키고 발전시킬 수 있는 인재를 양성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어떻게 보면 고등교육은 본질적으로 사치스러운 교육이자 귀족주의적 엘리트 교육이다.

이 지점에서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킬 수 있겠지만, 냉정히 현실을 바라보자.

우리는 이미 고등교육, 대학교육이 하향평준화 되어있으며 심지어 필요 없다는 생각이 공공연하지 않은가?

대학 교육이 '무조건' 필요한가 하는 물음에 확신에 차서 '필요하다'라고 말할 수 있는 시대인가?



 19세기(그보다 훨씬 이전부터) 유럽 전반에서 기독교적 신앙은 이미 신뢰를 잃었지만 기독교적 도덕은 현실을 외면한 채 개인을 가두는 족쇄가 되었다. 그 결과 니체는 '신은 죽었다'라고 선언했다.


  현대 대한민국에서 '고등 교육(대학)은 죽었다'라고 말해도 이상하지 않다. 대학은 실질적으로 필요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대학에 가지 않으면 큰일 난 것처럼 생각한다. 대학에 가는 것은 이제 하나의 사회적 '관습'으로 굳어져버려서 빠져나오기 힘든 것이다.

지방대 소멸 위기


 최근에 여러 지방대, 부실대가 논란이 되면서 정리가 될 듯 보인다. 하지만 이런 현상은 진실된 '교육적 목적'의 정리가 아니라 학령인구 감소로 인한 강제적 정리로 보여서 안타깝다.




 이로써 니체의 <우리 교육기관의 미래에 대하여> 강연을 읽을 준비는 어느 정도 된 것 같다.










무지한 스승 - 설명하는 교사와 해방시키는 교사


생존의 관점에서 보는 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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