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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브이 Aug 31. 2022

노력과 조력

2021년 1월 27일의 기록

처음 정신과에 다녀온 날,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엄마에게 이 사실을 말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고민했다. 해질 무렵 도착한 집에는 마침 엄마가 있었다. 시장에 갔다 먹을 걸 사 왔다는 엄마와 식탁에 마주 앉았다. 이때다, 라는 생각이 들어 병원에 다녀왔다는 말을 꺼냈다. 내 이야기를 쏟아놓기 바빠 엄마의 반응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병원에서 했던 이야기를 반복하며 나는 다시 눈물이 터졌고, 엄마도 눈물을 보였던 것 같다. 엄마는 괜찮다고 했다. 취업이 되지 않는 것도,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것도 괜찮다고, 엄마는 다 내려놓은 지 오래라고 했다. 엄마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너무 애쓰지 말란 말이었지만 나는 그게 어쩐지 더 슬퍼서 또 한참을 울었다.


며칠 후 엄마는 기장으로 드라이브를 가자고 했다. 엄마가 엄마의 드림카로 차를 바꾼 지 얼마 지나지 않은 때였다. 새 차 냄새에 약간 멀미를 느꼈지만 오랜만에 하는 드라이브는 무척 상쾌했고 기분이 좋았다. 어느 리조트의 산책로를 엄마와 함께 걸으며 나는 붉은 포인세티아의 사진을 찍었다. 돌아오는 길에 엄마는 내게 바람 쐬고 싶으면 언제든 말하라고 했다. 언제든 어디든, 좋은걸 많이 보러 돌아다니자고 했다.


정신과 약을 복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어렵게 고백한 두 번째 상대는 당시 장학생 신분으로 나가던 학과 사무실의 동료이자 선배, 조교 선생님이었다. 반려식물 커피나무 콩자의 시듦을 보고 나의 우울을 곁에서 가장 먼저 알아차려 주었던 사람. 이미 모든 걸 눈치채고 있었던 그는 늘 그랬듯, 내게 끝없는 무언의 지지를 보내주었다. 그리고 종종 장문의 메시지를 보내왔다. 그 다정한 메시지를 통해 나의 밝은 면과 재능, 잠재력에 대해 끊임없이 상기시켜주었다.

세 번째 상대는 대학원 동기이자 나의 솔메이트였던 림이었다. 우리는 스터디를 하기 위해 매주 만났었는데, 그맘때 림은 나에게 계속 ‘언니 무슨 일 있어요?’라고 물었다. 사실 언제나 내게 에너지와 웃음을 주던 림에게는 어두운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았다. 나도 그처럼 늘 빛나는 사람이고 싶었다. 하지만 결국 가장 가까운 사람이라는 생각에 병원에 다녀온 사실을 털어놓았다. 림은 너무나도 슬픈 표정으로 나의 이야기를 모두 들어주었다. 그리고 도움이 필요하면 꼭 이야기하라고 했다.


네 번째는 대학교 동기이자 동네 친구인 민석이었다. 둘 다 백수였던 그때 우리는 틈만 나면 만나서 맥주를 마시곤 했는데, 자주 가던 단골 맥주집에서 나는 민석이에게 정신과 약을 먹고 있다는 사실을 고백했다. 민석이는 그게 다 외로워서 그런 거라며 소개팅을 시켜주겠다고 했다. 이런 마음으론 누구도 만날 수 없다고 나는 웃어넘겼다. 민석이는 언제든 마음이 생기면 말하라고 했다. 매사 신중한 민석이가 누군가를 내게 소개해주겠다고 한 것은 10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나의 소중한 사람들은 나의 이야기에 마음 아파해주었고 함께 헤쳐 나가자며 손을 내밀어 주었다. 가까운 사람들을 통해 용기를 얻은 나는 이후로도 많은 주변 사람들에게 나의 상태를 알렸다. 도움이 필요하다고, 도와 달라고. 그리고, 정말 감사하게도, 모두 내 손을 잡아주었다.


깊은 우울에 빠져 있던 나에겐 나도 모르는 의지가 있었다. 상담을 받으러 가고, 병원에 가서 약을 처방받아먹어 보기도 하고, 우울해지기 전에 즐거웠던 일들이 무엇인지를 계속 기억해내려고 했다. 우울의 수렁에서 벗어나기 위해 나의 의지와 노력만큼 중요했던 것은  모든 과정을 묵묵히 지켜봐 주고 응원해준 모두들 덕분이라는 것을 나는 이제 안다.


호밀밭출판사 We-rite 참여 원고

http://bu-rite.com/bbs/board.php?bo_table=we7&wr_id=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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