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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브이 Aug 23. 2022

할머니의 장례식

2020년 11월 26일의 기록

새벽녘 잠에서 깨어 멍한 머리로 지난밤 꿈을 돌이켜본다.


아주 커다란 온돌방에 사람들이 모여 앉아 있다. 나는 무슨 억울한 누명을 쓴 듯했다. 어쩔 줄 몰라하는 나를 뜻밖의 사람이 감싸며 내 편을 든다. 고마운 마음과 동시에 긴장이 풀려 나는 목 놓아 울고 만다. 잠에서 완전히 깬 뒤에도 어쩐지 가슴 먹먹한 기분이 한동안 가시지 않았다.


늦잠을 자도 되었지만 나는 일단 일어나 씻기로 한다. 씻고 나와 다시 침대에 누워 있는데, 거실에서 아빠가 통화하는 소리가 들린다. ‘지금 바로 가겠습니다.’


할머니가 계신 병원으로부터 온 전화였다. 차를 타고 병원으로 가며 나는 다시 지난밤 꿈을 떠올렸다. 할머니는, 돌아가셨겠구나.


병원 입구에서 아빠는 말한다. 어머니가 위독하시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직원은 발열 체크와 간단한 신상만을 기록하게 한 뒤 우리 세 가족을 모두 들여보내 주었다. 처음 있는 일이다. 등록된 보호자가 아니어서 – 그나마도 1명만 등록이 가능하다 - 나는 그동안 언제 돌아가실지 모르는 할머니를 만나러 올 수도 없었다.


아무도 없는 병실에 할머니는 홀로 누워 있다. 틀니를 뺀 할머니의 얼굴은 벌써 미라 같았지만 할머니의 손은 생각보다 차갑지 않았다. 환자복이 헝클어져 드러난 몸은 앙상하게 말라 있었다. 아빠는 할머니의 손을 잡고 엉엉 울었고, 엄마는 할머니의 이마를 쓰다듬으며 훌쩍였다. 이윽고 눈이 빨갛게 충혈된 큰아버지가 코를 훌쩍이며 병실로 들어섰다.


슬퍼할 겨를도 없이, 장례 절차가 시작되었다. 클릭 몇 번으로 영정 사진 장식의 옵션을 고르고, 제사상차림과 손님들에게 낼 음식의 종류를 결정했다. 생각보다 많은 돈이 드는 일이었지만 그렇다고 감당 못할 정도는 아닌 것 같았다. 무엇보다도 일회용품의 가격이 만만치 않았는데, 보통 근무하는 회사에서 보내주니 구매하지 않아도 될 거라 했다.


영정 사진 속 할머니의 옥색 저고리가 너무 생기 있어 보여 도무지 실감이 안 났다. 당장이라도 곁에서 우리 강아지 하며 엉덩이를 두드려주실 것만 같았다.


할머니가 다니던 절의 주지스님을 보자마자 갑자기 눈물이 솟기 시작했다. 회색 법복이 할머니의 생전 모습을 생각나게 했다. 이윽고 스님이 염불을 시작했고, 나는 마침내 엉엉 소리 내어 울고 말았다.


오후 늦게 사촌동생의 회사에서 부의품이 도착했다. 젓가락과 종이컵, 그릇 등등에 커다랗게 밥솥으로 유명한 회사의 로고가 박혀있다. 내일 팀장이 오기로 했으니 일회용품을 곳곳에 로고가 잘 보이게 비치해야 한다며 분주한 사촌동생을 거들어주었다.


할머니가 늘 귀하신 몸이라며 애지중지했던 장손, 사촌오빠는 갑작스레 부산에 내려오게 되어 정신없는 눈치였다. 새언니도 내내 전화로 업무를 보았다. 처음 보는 새언니만큼이나 나긋나긋한 서울말이 낯설었다. 새언니를 소개하는 사촌오빠는 너무 빛나 보여서 눈이 부셨다. 다소곳이 사촌오빠 곁에 선 새언니도 너무나 사랑스러웠다.


새벽에는 사촌오빠의 회사로부터 부의품이 도착했다. 이번에는 유명한 은행의 로고가 박힌 일회용품이었는데, 뜻밖에도 세면도구와 수건, 실내용 슬리퍼까지 들어 있어 모두 감탄했다. 역시 대기업이 다르긴 다르구나, 가족 모두가 입을 모아 이야기했다. 누군가 슬리퍼를 신으라며 챙겨주었지만 나는 왠지 신기가 싫었다. 나는 자꾸 초라한 기분이 들었다.


빈소에 한 사람은 남아 있어야 했기에, 나는 입관식에 참여하지 못했다. 할머니 봤으니까, 나는 괜찮다고, 이틀 내내 지니고 있었던 할머니의 틀니를 엄마에게 건넸다. 범어사에서 ‘굿즈’라며 사서 차고 있었던 팔찌도 관에 넣어 달라 부탁하고 싶었지만 직접이 아니면 의미가 없다는 생각에 망설였다.


나는 더 분주히 손님을 맞았다. 할머니는 보고 계실 거야, 할머니는 아무리 그래도 내가 제일이라고 그렇게 말해주셨을 거야, 생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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