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전 78년 후에도 울지 못하는 사람에 관한 댄스퍼포먼스
재독 일본인 현대 무용가 에다 메구미(Eda Megumi)는 종군 간호사였던 할머니에 대한 개인적이고 상상적인 기억을 바탕으로 한 댄스퍼포먼스 공연 ‘울어주세요(Please Cry)를 베를린 독일레븐 (DOCK11)에서 선보였다. 우연히 필자가 베를린을 방문한 시기에 초연이 열렸고 공연 관람 후에 관객과의 대화도 참여할 수 있었다. 공연장 객석에는 일장기가 함께 인쇄된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의 프로파간다 내용을 담은 신문과 사탕이 놓여있었기에 공연 시작 전 약간의 거부감을 갖기도 한 것은 사실이다. 그만큼 이 공연은 예민하고 무거운 주제를 담고 있다.
작품의 창작은 에바 메구미가 할머니 사망 후에 2차 세계대전 당시 적십자 간호사로 중국 만주에 파견돼 복무한 할머니의 사진을 우연히 발견하게 되면서 시작됐다. 세련되고 완고하며 호탕한 성격이던 할머니는 단 한 번도 자신이 종군간호사였다는 사실을 말한 적이 없었다고 한다. 에다 메구미는 나중에 우연히 한 종군 간호사의 다큐멘터리 영화를 보게 됐고 주인공이 고백한 전쟁의 참상과 끔찍한 경험이 뇌에 각인되면서 할머니가 겪었을 전쟁의 경험에 대한 궁금증이 증폭됐다.
에바 메구미는 그녀가 전혀 알지 못하는 할머니가 어딘가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작품제작에 착수했고 2022년 9월 베를린 사운드댄스 페스티벌에서 리서치 공연으로서 선보였다. 당시 공연을 본 '독일레븐' (DOCK11)의 관계자가 작품을 더 다듬어 정식 공연으로 올려볼 것을 제안하게 됐고 한 달 후인 10월 27일 독일레븐 무대에서 55분 길이의 초연을 올리게 됐다.
공연 초반 무대에는 라이브 음악 연주자인 레이코 야마다( Reiko Yamada)만 있고 벽면의 스크린에는 에바 메구미가 무대 뒤에서 핸드폰을 이용해 촬영하고 있는 영상이 실시간 상영된다. 이와 동시에 에바 메구미가 교통사고로 65세에 타계한 할머니와 휴대폰으로 전쟁에 대해 이야기하는 오디오가 나온다. 할머니가 살아생전 이에 관해 전혀 이야기 나눈 적이 없으므로 그녀는 저세상에 있는 할머니에게 이제라도 연락해 질문을 던진다. 할머니와 통화가 끝나고 나서 무대로 나온 에바 메구미는 우유와 눈물, 진주 목걸이 등의 소재를 활용한 다양한 퍼포먼스를 보여준다. 에바 메구미는 핸드폰을 라이브 도구로 삼아 조작하면서 공연을 했고, 그 영상이 무선으로 전송돼 큰 화면으로 실시간 상영됐다. 같은 시간과 공간에서 무용수와 영화 제작자로서 두 가지 약할을 어떻게 조화시킬 수 있는지 탐구하는 유기적 형식의 공연이었다.
그녀가 우유를 작품의 중요한 소재로 사용한 이유는 작품 제작을 위해 당시 만주에 파견된 전 종군 간호사의 증언을 조사하던 중 알게 된 새로운 사실과 관련돼 있다. 간호사들은 전쟁 말기에 물자가 압도적으로 부족해서 상부 명령에 의해 부상자의 치료를 포기해야 했고, 부상당한 병사에게 진통제나 치료약 대신 시안화 칼륨(청산가리)을 섞은 연유를 마시게 하도록 지시받았다는 것. 패전이 알려졌을 때, 간호부장은 간호사들에게 청산가리를 나눠주며 “이것으로 자살하라”라고 명령하며, 이전에는 그 누구도 우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기에 “지금이라면 울어도 좋다, 울어라”라고 말했다고 한다. 간호사들은 청산가리를 마시지 않고 살아남는 길을 선택했다. 에바 메구미는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작품의 소재로 삼았고 제목도 따왔다. 그리고 전쟁에서 삶과 죽음이 동시에 존재하는 극단적인 상황을 춤으로 표현한다. 진주의 경우, 할머니가 평소 진주목걸이를 하고 다닌 이미지, 그리고 동양인에게 진주는 문학적으로 눈물을 상징하기에 그 이미지와 의미를 작품에 차용해 왔다고 한다.
태평양 전쟁 중 3만 명을 넘는 간호사가 소집돼 전장으로 보내졌고 중국 대륙에 파견됐던 일본 적십자 간호사들은 종전 후에는 침략한 구 소련군을 피해 내전이 계속되는 중국대륙의 땅을 방황하며 일본 귀국에 가장 오랜 시간이 걸린 집단 중 하나라고한다. 전범 국가이자 패전국인 일본에서 그 시기의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오랜시간 금기시됐는데, 특히 젊은 여성 간호사의 경우 전쟁 후 살기 위해 도망다니는 과정에서 성적 학대를 당하는 일도 많았기 때문에 이 경험을 입밖에 냈을 경우 '결혼을 할 수 없게 된다'는 사회적 금기 속에서 더 입을 열지 못했다고 한다.
에다 메구미에게 이 작품은 자신에게는 낯선 할머니의 초상을 그려나가는 과정으로 보인다. 피폭국가이자 전범 국가인 일본인으로서 종전 80년이 다 돼가는 오늘날까지 아직도 사회적으로 금기시되고 있는 이 무거운 주제를 무대에서 말하는 것은 쉽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그녀의 용기를 응원하며 앞으로 이 주제를 어떻게 예술적으로 발전시키며 이야기를 완성해 나가는지 지켜보고 싶다.
에바 메구미는 16세에 함부르크 발레 학교에 초빙되어 독일로 이주했으며, 이후 15년간 함부르크 발레단, 네덜란드 국립발레단, 램버트 댄스 컴퍼니에 소속되어 발레리나로 활동했다. 2004년 이후 뉴욕으로 옮겨 아미티지 곤!댄스(Armitage Gone!Dance)의 창설멤버로서 현대무용의 경계와 인식을 재정의하는 다양한 실험적 공연에 뮤즈로 참여해 왔다. 2019년부터는 베를린을 거점으로 유럽과 미국을 오가며 댄스, 영화, 퍼포먼스 등 다양한 예술분야를 접목해 활동하고 있다.
-참고자료-
Please Cry : DOCK11 홈페이지 공연소개
THE LEADS ASIA: 금기를 깨는 것은 개인의 기억뿐. 구 만주에 건너온 종군 간호사의 체험을 둘러싼 무대 「Please Cry」2022.12.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