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소설] 중독
“여러분 자리에 앉으세요!”
마이가 여자들에게 소리쳤다.
대기실 문이 활짝 열렸다. 십여 명의 남자들이 김 사장과 풍을 따라 줄을 지어 들어왔다. 그들이 한국 남자라는 걸 쉽게 알 수 있었다. 줄의 맨 앞에 선 사람이 작은 태극기 깃발을 들고 있는 게 보였다.
그들은 큰 이름표가 달린 줄 목걸이를 하고 있었다. 미스터 리, 미스터 김, 미스터 박 그리고 미스터 최. 모두 한국인의 성이었다. 나이는 40대에서 50대 정도 되어 보였다. 복장도 비슷했다. 쥐색과 암청색 같은 비슷한 색깔과 디자인의 정장 차림이었다.
유사한 모습들 사이로 거동이 불편해 보이는 50대 남자가 눈에 띄었다. ‘미스터 김’이라고 적힌 목걸이를 한 그는 왼쪽 팔과 다리를 약간 절고 있었다. 줄 끝에서 60대 중반으로 보이는 여자가 휠체어를 밀고 따라 들어왔다. 여자는 ‘미시즈 박’이라고 적힌 이름표를 매고 있었다. 휠체어에 앉은 남자는 다른 남자들보다 훨씬 젊어 보였다. ‘미스터 리’라고 적힌 목걸이를 한 그 남자가 손에 들고 있던 물병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미시즈 박’이 물병을 주워서 ‘미스터 리’에게 줬다. 둘은 모자지간이 분명했다.
란이 풍에게 뛰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삼촌, 저 아저씨들 싫어요. 내 이상형은 배용준이에요.”
란은 아이처럼 흐느꼈다.
란의 친구들은 모두 겁먹은 표정으로 이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풍이 남자들이 모두 돈 많은 사장님이니 결혼하면 공주처럼 살 수 있다며 거짓 위로를 했다. 마이가 굳은 표정으로 풍을 노려봤다. 풍이 마이를 불러 란을 데리고 가서 의자에 앉히라고 지시했다. 칼날 같았던 마이의 눈이 힘없이 풀렸다. 마이는 란을 부축해 흐엉의 옆 자리에 앉혔다. 나는 중앙 테이블 위에 있던 티슈를 갖고 란의 눈물을 닦아줬다. 마이가 내 모습을 멍하니 지켜보고 있었다.
“비자 받고 나서 바로 도망가면 돼. 나이 든 외국 남자랑 하룻밤 자는 건 좀 찝찝하지만, 그래도 김 사장이 수고비는 주니까 괜찮아.”
흐엉이 란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아주머니, 지금 그런 말이 나와요?”
내가 쏘아붙였다. 흐엉은 양심 없는 사람처럼 계속 말을 이어갔다.
“한국에 가고 싶다면서. 결혼을 해야 비자를 받을 수 있지 않겠어? 그만 울고. 얼른 맞선 봐야지. 동생 같아서 해주는 말이야.”
티슈로 눈물을 닦으며 흐엉의 말을 듣고 있던 란이 크게 날숨을 쉬었다.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로 고맙다고 했다. 란은 흐엉을 언니라고 불렀다. 란은 한국에 꼭 가고 싶다며 맞선을 보기로 결심했다.
김 사장이 남자들에게 한국어로 말했다. 남자들이 맞선녀들을 흩어보며 작은 수첩에 무언가를 적었다. 여자들의 가슴에 적힌 번호였다. ‘미시즈 박’도, ‘미스터 김’도 신중한 표정으로 메모하고 있었다. 그들이 신붓감을 선택하는 동안 흐엉과 란은 모델 자세를 하고 있었다.
나는 방관자처럼 이 광경을 주시했다. 마이가 내게 어떤 해명을 해주기를 고대하면서. 나를 선택할 남자는 없다고 생각했다. 티셔츠와 청바지 차림에 화장기 없는 민낯으로 무뚝뚝하게 앉아 있었으니까. 맞선 값 이만 동에 대한 미련은 버렸다. 까이랑으로 돌아갈 생각만 했다. 마이를 남겨둔 채 혼자 돌아가는 내 모습을 상상하니 씁쓸한 느낌이었다.
글 / 사진: 박경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