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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일기장

연산군이 즐겼던 온천

2024년 12월 11일 맑음

by 쾌주

한참을 벼르고 벼르다 목욕탕에 다녀왔다. 춥고 노곤한 날이면 온몸을 뜨거운 물에 푹 담그고 싶은 욕구가 절로 생겨나지만 좁디좁은 나의 집 욕실에는 욕조가 없다. 사실 샤워로는 채워지지 않는 그 무언가를 충족시키려면 단순한 욕조로도 부족하다. 뜨거운 공기와 어딘가 흐릿하고 울렁거리는 물 냄새를 맡으며 온몸을 쭉 펼치고는 이어 하는 소리를 낼 수 있는 그런 공간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런 공간을 느끼려면 목욕탕은 평일 오전에 가야 한다.


큰 마음을 먹고, 연차를 쓰고 목욕탕으로 향한다. 우리 동네에 있는 목욕탕은 정확히는 온천이다. 고문서에 따르면 연산군은 승마를 한 후 이곳에서 휴식을 즐겼다고 한다. 당시 지명은 온수골. 참으로 명확한 이름이다. 연산군은 사대문 안에서 거주를 했을 텐데 여기까지 승마를 왔나. 궁으로 돌아가는 길에 다시 말을 탔다면 기껏 씻은 몸이 다시 더러워졌을 텐데 돌아가서 다시 씻었을까 씻지 않았을까. 의식의 흐름이 마구 뻗쳐간다.


*


어렸을 때의 나는 물을 싫어했다. 10살 때 수영을 배우러 갔다가 눈이 나빠 집합에 조금 늦었는데 강사님은 나를 번쩍 들어 올려 냅다 물에 집어던졌다. 그 후로 나는 단 한 번도 수영을 배우러 가지 않았다. 빨간 수영복과 노란 꽃이 달린 수모와도 영원히 작별했다.


당신이 부곡 하와이를 안다면 떠올렸을 그것


11살이 되면서 엄마는 이제부터 혼자서 씻으라고 단호하게 말씀하셨고, 당시 우리 집은 기름보일러를 쓰는 주택이었다. 밖으로 창문이 난 욕실은 매우 추웠고, 뜨거운 물은 한참 후에나 나왔다. 나는 언제쯤 물이 따뜻해질까를 기다리며 벌거벗은 채 샤워기에 손을 댔다 뗐다 하면서 오들오들 떨어야 했다.


그때부터 한참 동안 물은 내게 있어 무섭고, 추운 것이었다.


28살, 아파트로 이사가게 되면서 추위는 사라졌다. 새로 지은 아파트의 욕실은 깨끗했고, 라디에이터가 있었고 욕조가 있었다. 나는 욕조에 물을 가득 받아서 노래를 크게 틀고 몸을 담갔다. 따뜻했다. 그때 깨달았다. 나는 더러운 게 아니라 추운 게 싫은 거였어!


*


온천은 지하 3층에 있었다. 리모델링을 한지 오래지 않아 내부는 무척 깔끔했다. 목욕탕과는 다르다는 자부심인지, 혹은 그냥 주인 성향인지 모르겠지만 티브이조차 없었고, 여러 가지 물건을 파는 매대나 사람들이 앉아서 수다를 떨곤 하는 소파도 마루도 없었다. 평일 오전 시간이라 사람도 없었다. 나는 훌훌 벗은 채로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다 탕으로 들어갔다.


40도의 온탕과 54도의 열탕, 22도의 이벤트탕 옆으로는 냉탕이 아주 커다랗게 있었다. 거짓말 좀 보태서 웬만한 수영장의 보조풀만 했다. 나는 한여름에도 뜨거운 물로 씻지 못하면 그냥 안 씻고 참겠다는 사람이지만 갑자기 유영이 너무나 하고 싶었다. 수영을 배운 지 너무 오래되어서 여전히 뜰 수 있는지 궁금했다.


일단 목욕탕에 온 모든 목적을 이룩한 뒤 나는 시험 삼아 이벤트탕에 발을 담가보았다. 차가웠다. 하지만 아무도 없는 기다란 냉탕이 선선한 공기를 내게 계속 보내고 있었다. 일단 물속에 들어가면 춥지 않다. 용감하게 이벤트탕에 온몸을 적신 나는 냉탕을 향해 가서 일단 손을 집어넣었다. 너무너무 차가웠다.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나는 이제 유혹받지 않을 나이다. 안 되겠다는 유혹을 뿌리친 나는 성큼성큼 냉탕으로 발을 집어넣었고 한참이 걸려 온몸을 물속에 집어넣을 수 있었다. 이젠 차갑지 않다.


나는 가만히 머리를 뒤로 젖히고 몸을 띄운다. 귀가 물속에 잠기면서 세상의 소리가 울먹울먹 해진다. 목욕탕 천장에는 물이 맺혀있지 않다. 나를 떠받치고 있는 물은 한없이 부드럽고 꿈결 같다. 이 속으로 영원히 잠겨 들고 싶다.


이번에는 몸을 뒤집어 바닥을 본다. 눈을 떠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 세계. 물속에서 팔을 저어 앞으로 나아간다. 소리 없이 물살이 갈라지면서 내 손을 빠져나간다. 움켜쥐고 싶다. 영원히 이 느낌을 간직할 수 있다면.


그렇게 나는 집으로 돌아왔다.


다 이루었다. 연산군이 부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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