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새벽에 퇴근 후 택시에서 내리면 일부러 동네 한 바퀴를 빙 둘러 걷는다.
몸은 고단하지만 얇게 날이 선 정신.
동네 가로등이 밝혀주는 걸음마다 말랑하고도 날카로운 감각.
자주 보이는 회갈색 털에 검정 줄무늬가 있는 고양이가 느긋하게 꼬리를 세우고 지나간다.
‘일일시호일(日日是好日)’이라고 하지만 내일은 또 어떤 갑갑함이 내 목젖까지 욱하고 올라올지.
내일에 대한 것들 지나간 걸음마다 도장처럼 찍어놓고 집으로 돌아간다.
이런 말들 유행이었는데 ‘해 뜨기 전이 가장 어둡다’랑 ‘비 온 뒤 맑음’ 같은 것들.
가끔 염세주의까지는 아닌데, 한국은 정말 치열한 것 같아.
1위를 강조해서 그런가? OECD에서 1위 하는 것도 있듯이.
호흡
코로나19 때문에 집에 있는 시간이 늘어났다.
마음은 늘 분주했지만, 몸은 여유로웠던 탓인지 기울기가 안맞는듯한 불안정함을 느꼈다.
그래서 갑자기 명상이 하고 싶어졌다. 마인드풀 TV, 명상 앱 ‘코끼리’와 ‘Calm’ 등을 들어보다가 명상 앱 <마음보기>에 정착했다. 지금까지 서서히 마음의 근육을 만들고 있는 중. 코로나19 덕분에 취향이 하나 늘었다.
파피에르 다르메니, 헴, 다르샨, 디아론 등 인센스를 알아가는 재미를 느끼고 있는 중.
공간의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들어주고, 늘 힘 들어가던 심신에도 부드러움을 준다.
이때 중요한 것은 호흡. 세 번의 큰 호흡을 한 뒤, 바른 자세를 유지한다.
아침을 깨워주는 힘과 저녁을 정리하는 기분 그리고 목이 뻣뻣해지거나 생각이 분주해지면 코끝으로 느껴지는 들숨과 날숨으로 잠시 마음을 비워낸다. 거창하게 내면을 찾는다거나 무아지경의 상태를 원하는 것이 아닌, 그냥 호흡을 고르는 행동. 그렇게 현재에 집중하며 살아가게 하는 행위.
무엇보다 일상에서 나를 지켜주는 부드러운 방어막.
여유
자유는 불안을 동반한다.
오롯이 하나의 감정만 느끼는 것은 드물다.
맛있는 점심을 먹을 때에도 저녁은 어떤 걸 먹을지에 대한 고민.
갖고 싶었던 물건을 사면서도 다음 달은 아껴 써야 한다는 생각.
몸은 늘 편하면 좋겠다고 하지만 경력보다 실력이 뒤처지는 건 아닐지에 대한 걱정.
가끔 ‘장난감처럼 스위치가 있어서 온/오프가 되면 좋겠다’라는 엉뚱한 생각 발사.
그러면 한 곳에만 집중할 수 있을 것 같은 데 말이야.
지금 먹고 있는 것에만, 새로 가지는 물건에만, 일은 일로만 그리고 쉼은 오직 쉼으로만.
묵직한 쇠 구슬이 되어 천천히 이동하면 좋겠지만,
바다를 옆에 두고 오늘도 하염없이 이리저리 튕기고, 부딪히는 가벼운 비치볼 같다.
모든 것은 때가 있으니,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불안해하지도 조급해하지도 않기.
지나고 보면 다 이유가 있을 것이니, 조그만 틈을 열어 여유를 꺼내 볼 것.
이렇게 오늘도 꾹꾹 눌러 담는 나의 자유와 불안.
날개
마티스의 <이카루스>를 오마주로 다양한 컬러를 사용해 그림을 그려본 적이 있다.
이 그림이 처음에는 단순히 날개가 타버려 떨어지는 사람의 모습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내 육체는 떨어지지만, 정신은 상승한다”라고 마티스가 말했다는데 사실인지는 모르겠다.
아무튼 다른 찬사들도 많겠지만 나를 사로잡은 건, 병상에서도 그림에 대한 열정으로 새로운 기법을 만들어냈다는 것. 즉, 이것을 어떻게 가지고 놀지 탐구하고 재창조하는 긍정적인 자세와 차별화된 집착. 깊이 있는 감동을 위해 상상하지 못할 묵묵했던 시간을 어떻게 보냈을지 궁금해진다.
간다, 내 길을.
무엇인지 끊임없이 찾는다. 내가 정말 좋아하는 것을.
계속해서 쌓는다. 오감이 깊어지고 넓어지게.
꾸밈없고 거짓 없이 마음을 활짝 펴고 즐겁게.
미련 없고 후회 없이 다쳐도 상관없으니,
나만의 것을 만들기 위해 그곳을 향해, 점프
그리고 힘찬 날갯짓.
보름달
밤이 찾아오면 온종일 울던 핸드폰도 조용해진다.
밖으로 터덜터덜 나와 하늘을 올려다보며, 한숨으로 구름을 만들어본다.
굳어있던 몸과 정신을 뱉어내며 하루를 정리하는 기분.
두둥실 검은 바다에서 인사하는 밝은 달.
“What is your surname?”
“Moon”
“It’s so lovely”
영국에서 NI(National Insurance) 넘버 인터뷰 중 받았던 기분 좋은 말.
나는 작은 것에도 의미부여 하는 것을 좋아하는데, 성씨 때문에 어릴 때부터 그냥 달을 좋아했다.
기분 게이지가 조금 낮은 날에는 꽉 찬 보름달이 나를 응원해 주는 것 같았고, 맘껏 들뜬 날에는 초승달이 나와 같이 웃어주는 것 같았다.
나보다 위에 있는 너도 작아졌다 커지기를 반복하는데,
나라고 언제나 커다란 모습을 유지하는 건 순리가 아니겠지.
너는 하루도 빠짐없이 우리를 밝혀준다.
나도 너처럼 그렇게 꾸준함을 가지면 좋겠다.
너는 어둠 속 혼자인 것 같지만 언제나 별들이 함께한다.
그렇게 나도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여서 혼자가 아니다.
가끔 구름이 나와 너를 가릴지라도,
밝은 마음으로 느긋하게 기다리면,
오늘도 의미 있는 그런 하루가 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