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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문장들

by 파도

낯섦

노트북 우하단에는 스티커 메모장이 있다. [DO] 라는 제목의 나만의 해야 하는 리스트들이다. 지금 당장 첫 번째로 해야 할 것은 톤앤매너와 등장 레퍼런스 찾기 그런데 나는 지금 에세이를 쓰고 있다. 안 하던 짓.


<안 하던 짓 하니 살짝 재밌어졌다> - 도리이 미코


안 하던 짓을 하면 현재의 감정에서 벗어나 잠시 다른 곳으로 나를 옮겨다 준다. 옷장 구석에 오랫동안 안 입었던 옷 입기, 새로운 음식점 찾아가기, 평소와는 다른 장르의 음악 듣기, 토마토 키우기, 집으로 가는 새로운 길 찾기 등 7할은 “아 괜히 했네" 싶지만 3할은 “아 재미있다. 이번 것도 성공이야.” 그러게 말이야 타율 3할이면 에이스 타자잖아. 그런데 왜 안 하던 짓을 하는 건지, 제자리걸음이라는 느낌이 싫은 건지 아니면 이미 모두 발견해버린 땅덩어리에서 탐험가 정신이 남아있는지. 나는 오늘도 평소와는 다른 낯‘섬'을 찾으러 항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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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

“나는 네가 O형인 줄 알았어.”

MBTI가 나오기 전에는 혈액형으로 성격을 맞춰가던 시절, 대부분의 사람이 나의 혈액형을 다르게 보았다. 성격 유형은 ENTJ이지만, 가끔 내가 A형이 맞는구나 라는 생각을 하는데, 그것은 무언가를 시작할 때인 것 같다.


‘갈까 말까 할 때는 가라' - 최종훈


계획적이고 준비가 되어야 해서 그리고 불편하고, 낯설어서 등의 이유로 하기 전에 고민이 상당히 많은 편이다. 그런데 최종훈 교수의 인생 교훈을 본 뒤, 그나마 시작이 쉬워졌다.


시작이 어려웠지 지나고 보면 별것 아니네- 이곳에 안 왔으면 큰일 날 뻔했다- 지레 겁먹지 말자- 지금 에세이 쓰는 것도 마찬가지. 내가 어떻게 책을 만들 수 있어? 어떻게 일을 하면서 매일 글을 쓸 수 있을까 피곤하지 않을까? 나의 문장력이 내 생각이 별 볼 일 없어 보이지 않을까? 읽을만한 가치가 있을까? 이제는 그냥 한다. 나를 이곳까지 성장하게 해준 하나의 문장. 이러한 조그만 시도들이 원석인 나를 ‘툭' 구르게 하여 깎고 깎는 시간이 되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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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일

일어났는데 입술이 거무튀튀하다. 충분히 잔 것 같은데도 피곤하고 기력이 없어 내과에서 피검사를 받았다. 검사 결과- AST가 H, Vitamin D가 L- “네?” 간 수치가 높고, 비타민 D가 부족이란다. “저는 술 한 잔만 마셔도 빨개져서 마시지 않는데 왜 이렇게 간 수치가 높을까요?” 간이 하는 기능이 자동차보다 많다는데, 간이 예민해서 그럴 수도 있단다.


‘당신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을 단순하게 받아들여라' - <시리어스 맨>


술뿐만이 아니라 유해 물질이 많이 들어오면 간 수치가 높아지고, 수면 부족 그리고 스트레스도 수치를 높인다고 했다. 커피에 영향이 없는 편이면 영양제로 커큐민, 코큐텐, 비타민D를 추천해주셨다. 직업 특성상 밤새는 일이 잦은데 그리고 스트레스가 많은 직업인데- 어쩌지? 라는 생각 한 방울이 깊숙하게 내 몸을 들어와 나의 온몸을 훑고 지나갔다.


직업을 바꿔야 하나, 그럼 나는 어떤 재미난 걸 하면서 살지에 대한 답 없는 고민까지. 간 때문이야 간 때문이야. 한바탕 꿈이라 생각하고 그냥 마음 편안하게 한 해를 또 곱게 보내자. 그래, 마음의 추를 가볍게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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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장

모든 일이 일련의 과정이 있겠지만 쉽게 진행되는 건 하나도 없는 것 같다. 이 고개만 넘으면 괜찮겠지, 이 산만 넘으면 될지 그리고 어떤 산에서 휴식을 할 수 있을지. 알면 알수록, 배우면 배울수록 어렵다.


‘작품은 땀으로 만들어진다' - 장 콕토


자비에 돌란의 오른쪽 무릎엔 프랑스어로 장 콕토의 명언이 새겨져 있단다. 거장과 장인들에게는 어떤 힘을 가지고 있을지. 단순히 보이는 성공의 이면에는 어떤 어둠들이 있었을지. 자신만의 색깔을 내보이고, 자신만의 이야기를 날카롭게 풀어내어 받아들여지는 이들의 가슴 한 켠을 세게 긁기까지의 과정들. 모두 꿈을 위해 노력하는데 성공과 실패로 나뉘는 이유는 무엇인지. 천재성이 부족하다고 생각하면 너무 슬픈 일이니, 나의 고민과 땀의 무게가 그들보다 적다고 생각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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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몽

S#. (저녁 하늘/밖) (S.E 강아지 짖는 소리)

흘러가는 듯한 구름 사이에 별 하나가 떠 있다. 고개가 꺾일 정도로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 주인공.

주인공 : (V.O) 너무 위만 보고 살았나. 꿈과 현실의 간극이 처량해서 그렇게 부서지듯 아파해야 했나.


주인공의 머리 위로 부드럽게 올라오는 자막.


‘위를 보며 좌절하지 말고 아래를 보며 자만하지 마라'


나의 인생이 영화라면 어제의 저녁 씬. 하나씩 하나씩 만들어가며 단 하나의 나만의 스토리가 만들어지겠지. 남과의 비교에서 오는 무력감에 나는 더 잘해야겠다는 겸손함. 가끔은 일이 아니라 배우려는 애티튜드가 장착되면 일이 재밌어진다. 하지만 지금도 어릴 때와 똑같이 빨리 크고 싶고, 빨리 잘하고 싶은 욕심. 사람답게 사는 것은 어떤 것인가. 내심외경, 일장춘몽 그래서 메멘토 모리. 인생은 아름답다는데 아직은 잘 ‘모리’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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