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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르바 Oct 23. 2020

내가 취재를 하며 배운 한가지

디테일의 힘

내가 언론사에 첫발을 디딘 때는 2016년 1월이다. 운이 좋게도 대학교 방학을 맞아 일간지 신문사의 인턴기자로 활동할 기회를 가졌다. 미션은 여의도에서 열린 롯데면세점 노동조합의 집회 현장을 찾아 취재하는 것. 면세사업권 박탈에 따른 규탄대회였다. 수많은 참가자들이 다 함께 투쟁!을 외치고 있었다. 현장 스케치를 한 뒤 보고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현장 상황을 기자수첩에 빽빽이 채웠다. 적당히 취재를 마치고 선배에게 보고 전화를 걸었다.


"보고 드립니다. 3시부터 수백 명의 노동조합원들이 자리에 앉아 규탄 결의 대회를 진행 중입니다."

"몇 명이 참석했죠?"

"음... 한 200명쯤 돼 보입니다..."

"확실한가요?"

"대략 그런 것 같은데 세보지는 못했습니다."

"참가자들은 모두 조합원인가요?"

"아마 그럴 것 같습니다."

"확인해봤나요?"

"아닙니다."


"취재에 구체성이 전혀 없네요."

선배는 따끔하게 혼을 냈다. 업계 용어로 '디테일'이 없다는 말이었다. 나는 현장에 직접 갔음에도 참가자들이 조합 소속인지 아니면 일반 시민들이 섞여 있는지 알아보지 않았다. 추운 겨울 길거리로 뛰쳐나온 집회 참가자 각자의 사연을 전혀 물어보지 않았다. 구체적으로 물어보지 않았으니 이들은 그저 조합원이라는 이름 하나로 뭉뚱그려졌다.


선배의 조언을 듣고 다시 취재를 하자 집회 현장은 완전히 달라져 보였다. 참가자 각각은 모두 그들만의 사연을 가지고 이곳으로 나왔다. 집회 참가자들은 더 이상 참가자1, 참가자10, 참가자125가 아니었다. 회사에 반차를 내고 찾은 두 아이의 엄마였고, 딸의 졸업식에 참석하지 못하고 집회 현장을 찾은 누군가의 아버지였다.


2016년 당시 집회 현장 모습

그 이후 어떤 취재를 하든 구체성을 가장 중요시하게 됐다. 5년 차 기자가 된 지금까지도 그 원칙만큼은 변함이 없다. 집회 현장에서 소매치기범을 잡은 시민이 취재하다보니 이효리의 친오빠였다. 디테일을 찾아내니 기사 가치가 확 달라졌다. 서울 도심 한복판에서 건물이 무너져 내리며 사망한 여성은 남자 친구와 함께 결혼반지를 찾으러 가던 예비신부였다. 단순한 사망 사고로 잊힐 수 있었던 사건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고, 같은 사고가 재발하지 않도록 힘을 부여해줬다. 임신한 아내를 위해 크림빵을 사들고 가다 뺑소니를 당한 '크림빵 아빠'나 전역을 앞두고 음주운전 뺑소니 사고를 당한 윤창호군의 사연 모두 마찬가지다.


한 사람의 삶은 우주보다 크다는 말을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다. 이처럼 구체성 속에서 모든 개별적 존재는 각자의 색깔을 뽐내며 살아 숨쉬게 된다. 반면에 집단적 존재는 추상적이고 관념적이다. 거창해 보이지만 생기가 없다. 마음을 움직이는 감정이 녹아들기 어렵다. 그래서인지 정치인들이 귀가 닳도록 외치는 국민, 행복, 정의 같은 말 내게 와 닿지가 않는다. 개별성이 말살돼 버린 느낌이 들어서다. 진저리가 나는 것도 같은 이유일테다.


일상의 관계에도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아~ 그때 그 기자"보다는 "회사일 때문에 힘들 때 따뜻한 차 한잔 가져다주면서 '힘내세요'라고 말해준 그 사람"으로 기억된다면 좋겠다. 나 역시 그렇게 바라보고 싶다. "그 여자"보다는 "긴 생머리에 꽃무늬 원피스가 잘 어울리는 눈웃음이 아름다운 여자"로 기억하 싶다. 각자의 개별성을 알아봐 주는 서로가 있다면, 그보다 더 소중한 관계가 또 있을까.


취재를 할 때 핵심은 디테일이다. 디테일 관심과 애정에서부터 시작한다고 믿는다. 그래야 보인다. 짧은 기자 생활에 근거하면 그렇다. 일상생활도 피차 크게 다를 바 없지 않을까. 상대방의 세계를 들여다보려는 애정과 관심이 없다면, 나는 그저 '그 기자'일 것이며 상대는 그저 '그 여자'그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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