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관계
'같은 곳을 바라본다'는 말을 이해하지 못할 때가 있었다. 사랑하는데 같은 곳을 왜 봐. 서로 불타 죽어도 모자랄 판인데. 사랑하면 서로를 바라봐야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같은 곳이라는 관계의 방향에는 상대방이 빠져있는 듯 보였다. 사랑이라기보다는 이기적인 말로 들렸다. 시집에나 나오는, 현실에는 적용되지 않는 이상주의적인 말. 나의 사랑은 서로를 바라보는 것이었다. 모든 것을 내어주는 사랑이다. 일도 돈도 시간도 사랑 앞에선 속절없었다. 사랑이니까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스무 살부터 서른 살까지, 첫 연애부터 끝 연애까지 모든 사랑은 서로를 향했다.
서로가 상대를 향해 달려갈수록 사랑은 점점 깊어진다고 믿었다. 나는 그녀를 향해 모든 것을 내주었고, 비어버린 나를 그녀로 채웠다. 하지만 사랑에 취해 나를 잃고 있다는 사실을 그땐 깨닫지 못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녀로 가득 차 버린 나는 더 이상 예전의 내가 아니었다. 상대에 의해서만 나의 존재가 드러나는 관계로 변했다. 욕심과 집착이라는 그림자가 늘 따라올 수밖에 없었다. 자신을 잃으며 나로 채운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예전만큼 내가 나를 내어주지 못하자 "왜 달라졌냐"는 말로 다툼은 불처럼 번졌다. 어쩌면 그녀는 자신을 부정당하는 기분을 느꼈는지도 모른다. "사랑해"라는 말은 '최소한 내가 사랑하는 크기만큼은 너도 날 사랑해줘야 해'라는 말을 함축하게 됐다. 선물은 '이 정도 가치에 걸맞은 무언가를 너도 해주길 기대한다'는 상징물처럼 변했다. 기념일은 둘 다 챙기거나, 둘 다 챙기지 않아야 유지되는 눈치게임 같은 것.
애초에 관계 설정의 방향이 잘못된 이상 한걸음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발버둥치면 칠수록 헤어나오지 못하는 흙구덩이 속으로 빨려 들어만 갔다. 그땐 알지 못했다. 나를 나답게, 그녀를 그녀답게 해 주며 함께 사랑의 파이를 키워가는 관계. 서로를 배려하고 지지하며 같은 목적지로 나아가는 코-파일럿 같은 사이. 같은 곳을 바라본다는 관계를 이해하기에 나는 너무나도 사랑에 미숙한 초보였다. 그저 서로가 상대만을 바라보고 자신의 모든 것을 내주는 관계만이 유일한 사랑이라고 믿었으니까. 다른 방향을 몰랐기에 나는 그녀를 원망했고, 그녀는 나를 원망했다. 사랑의 크기가 터진 풍선처럼 쪼그라들고 나서도 도무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상대를 탓하는 것 외에는 별 다른 수가 없었다. 결국 서로를 향하던 사랑이 서로를 겨누는 총으로 변했다. 끝이 나고 나서도 한동안 서로의 가슴에 총알을 박아댔다.
첫사랑을 한 지 10년이 지나서야 조금은 알 것 같다. 어쩌면 관계의 어긋남은 나와 그녀, 모두의 잘못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는 것을. 순수했던 우리는 뜨거운 사랑을 했고, 다만 관계 설정에 조금은 미숙했던 두 사람이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미숙했던 그 시절의 나를 품어주기로 했다. 나와 함께 해준 그녀와의 시간을 모두 받아들이기로 했다. 늦었지만 그때 해주지 못한 이 말을 그녀에게 건네고 싶다. 헤매던 나의 청춘과 함께 해줘서 고맙다고. 참 고생 많았다고. 누구의 잘못도 아니기에, 이제 다 괜찮을 거라고. 어쩌다 보니 나에게 하는 말처럼 들리는 건 왜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