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에 살던 나는 서울의 번쩍이는 삶을 꿈꿨다. 드라마를 볼 때면 그 마음이 커졌다. 양복을 잘 차려입은 직장인이 가득 찬 광화문, 예술가들이 넘쳐난다는 홍대, 반짝이는 크리스마스 전구로 가득한 명동. TV 화면 속 남자 주인공이 된 나를 상상했다. 멋져 보였다. 소파에 누워 꾀죄죄하게 TV를 보는 실제 내 모습과는 달리. 경주는 내가 있을만한 도시가 아니었다. 스무 살 무렵 꿈을 이뤘다. 하지만 현실과 드라마는 달랐다. 광화문 직장인이 된 나는 우울했고, 홍대에는 프랜차이즈 가게만이 남았으며, 명동에는 중국어로 가득했다. 삶에 지친 탓일까. 그럴 때마다 경주를 찾게 된다.
경주 황리단길(출처: 경주시청)
경주는 낮은 도시다. 경주에는 고도제한이 있다. 어느 건물도 높이를 뽐내지 않는다. 다들 서로를 배려하며 자기를 낮추고 있다. 낮춘 이들은 하나의 풍경 속에서 서로를 지탱해준다. 한 폭의 그림 같다. 늘 위쪽만 쳐다보던 나였다. 경주에서는 솟아오른 욕망을 잠시 내려놓는다. 어우러진 기와지붕들의 출렁이는 물결에 몸을 맡긴다. 불룩 튀어나온 심보가 겸연쩍다. 옆을 둘러보니 이웃들의 삶이 들려온다. 낮아지고 나서야 깨닫는다. 내가 보지 못했을 뿐, 우리는 늘 함께였구나. 마음이 낮아지자 넉넉해진다.
대릉원에서 찍은 사진.
경주는 느린 도시다. 연봉이 얼마니, 집은 있니, 무슨 차 타니, 직업이 뭐니, 집안은 어떠니. 어느 하나라도 앞서고 싶은 마음을 안고 경주에 도착했다. 경주에는 유구한 시간이 느릿느릿 쌓여 있다. 발 밑에는 여전히 신라인의 흔적이 살아 숨 쉰다. 도심 한가운데 자리 잡은 능을 만난다. 능은 삶의 유한함을 넌지시 말해준다. 서두르지 말라고. 잠깐 쉬어도 된다고. 여유를 가지고 메멘토 모리. 아등바등 바삐 흘려보낸 시간이 천년앞에서 초라하다. 잘나 보이고 싶던 마음이 부끄러워진다. 느려지자 한없이 겸손해진다.
경주 남산(출처: 경주시청)
경주는 비어 있는 도시다. 서울에서는 꽉 채워진 삶을 살았다. 빠질 것 없는 완벽한 도시. 원하는 무엇이든 서울만큼 빨리 구해내는 도시가 또 있을까. 서울의 자랑 대중교통은 거미줄처럼 나를 꽉 붙잡아둔다. 어디든 맛집과 쇼핑, 문화공간이 빽빽하다. 새로움 투성이 인데 어디에도 내 것은 없는 것 같다. 편안한 것 같은데 숨이 막히는 건 왜일까. 경주에 도착해 크게 긴 숨을 내쉰다. 나와 경주 사이 빈틈으로 바람이 숭숭 불어온다. 빈 공간을 나만의 추억으로 채워 넣는다. 연인과 함께라면 빈 공간은 둘만의 이야기로 재탄생한다. 천마총, 석가탑, 교촌마을, 첨성대, 안압지, 남산 사이사이는 비어 있기에 빛이 난다. 어느 누구도 저들 사이를 채우려들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