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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르바 Dec 22. 2020

오늘 내가 산 다섯 권의 책

글쓰기가 안 되면 책을 삽니다

일을 마치고 오랜만에 서점에 들렀다. 몰아치던 글쓰기가 한동안 손에 잡히지 않아서다. 한 달 가까이 글쓰기를 방치했던 건 여러 이유가 있었다. 회사 특별 취재팀에 차출돼 기사를 쓰느라 업무량이 훌쩍 늘어났고, 주식을 시작하며 머릿속이 온통 돈으로 가득 차 버리니 돈 되지 않는 글 쓸 틈이 어딨었겠나,라고 변명하고 싶은데 이는 사실 잘 만들어낸 핑계일 뿐이다. 하루 이틀 귀찮아서 미루다 보니 일주일이 되고 한 달이 되면서 어느새  글쓰기를 받아들이면 안 되는 바이러스 같은 존재로 인식했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뇌는 몸에게 글쓰기를 중단하라는 명령을 지속적으로 내렸고 나는 글쓰지 않을 온갖 변명을 기어코 찾아내고 말았다.


서점을 찾아 글쓰기에 도움되는 책을 사 머릿속에 강제 주입하는 방법을 쓰기로 했다. 글쓰기 책이나 에세이집을 머릿속으로 밀어 넣으면 뇌가 다시 글쓰기에 마음을 열지 않을까 싶었다. 평소에도 무언가 새롭게 시작하거나 잘 풀리지 않을 때면 늘 서점을 찾아 책의 도움을 받아 왔다. 가령 헬스를 처음 시작한다면 운동 관련된 책들을 모조리 사서 읽어보는 식이다. 헬스의 정석, 헬스 에세이, 30일 만에 몸짱 되는 법 등 닥치는 대로 사 읽으며 새로운 무언가에 대한 윤곽을 그려내는 것이다. 물론 책값이 부담될 수 있겠지만 어릴 적 책 사는데 돈 아끼지 말라는 부모님의 가르침을 핑계로 웬만한 책은 다 사서 읽는 편이다. 책이 집에 있어야 내용이 머릿속에서 도망가지 않는다는 심리적 안정감도 든다.



가장 먼저 찜한 책은 <일간 이슬아 수필집>이다. 이슬아 작가는 SNS에서 어렴풋이 여러 번 들었다. 떠오르는 작가라고들 했지만 한 번도 관심을 가져본  없었다. 이 책은 '일간 이슬아'라는 온라인 사이트에서 구독을 하면 매일 그녀가 쓴 에세이 한편씩을 전송해주는데, 한 해 동안 쓴 글들을 묶어놨다. 이번 기회에 이 책을 산 이유는 내용이 궁금해서라기 보다는 하루도 빼놓지 않고 일 년 간 쓴 글을 묶어낸 작가의 정신력이 궁금해서였다. 들쭉날쭉 글을 쓰는 나는 이슬아 수필집을 '글은 엉덩이로 쓰는 것이다.'라는 하나의 오브제로 삼고 싶었다. 글이 써지지 않을 때면 매일 한 편 써그녀의 에세이를 보고 '뭐든 세상에 안 되는 건 없구나.'라며 자아성찰을 할 수 있게 되려나. 



두 번째로 고른 책은 정호승 시인의 <외로워도 외롭지 않다>라는 시가 있는 산문집이었다. 정호승 시인의 시는 수능 지문에 자주 등장해 익숙한 편이다. 하지만 평소 시를 즐겨 있는 성격이 아니다 보니 지금껏 시집을 산 경우는 거의 없었다. 시는 도화지에 점 하나 찍고 남는 공간을 텅 비어 두니, 상상력이 부족한 내가 전체 그림을 이해하기엔 벅찼다고나 할까. 그런데 이 책은 시를 보여주고 다음 장에 같은 주제를 산문형식으로 풀어냈다. 돌돌 말아 숨겨둔 시와 다시 돌돌 풀어내는 산문을 비교는 재미가 쏠쏠할 것 같았다. 대번에 구매리스트에 올렸다. 얼마 전 읽은 책에서 '산문 작가는 시를 읽어야 하고, 기자들은 단편소설을 읽어야 한다'라는 문구가 떠올랐다. 산문이 시로 변하고, 시가 산문으로 변하는 제작 과정을 한눈에 담았다니 이보다 신기하고 설레는 일은 없을 것 같았다.



다음으로 고른 책은 김신회 작가의 <심심과 열심>이라는 에세이 쓰기에 관한 책. '심심한 일상을 열심히 쓰는 것, 그게 바로 에세이다'라는 띠지에 적힌 글귀가 마음에 들었다. '별 것 없어 보이는  일상을 굳이 글로 쓸 필요가 있으려나.' 글쓰기의 존재론적 회의가 펄펄 끓어 넘치려는 타이밍에 냄비 뚜껑 회의감을 가라앉주는 적절한 글귀였다. 또 작가는 '요즈음 에세이는 개나 소나 쓴다'는 비아냥을 '개나 소나 쓸 수 있는 게 에세이의 매력이다'라는 뜻으로 해석해낸다. 에세이 만세를 외친다. 개나 소나 나나 다 쓸 수 있는 거라니! 개나 소와 자웅을 겨루는 내게 용기를 북돋아 준다.



마지막 두 권의 책은 장강명 작가의 <책, 이게 뭐라고>와 <책 한번 써봅시다>이다. 장강명 작가가 책을 엄청 좋아해서 인지 두 권 모두 글 쓰는 법과 책과 얽힌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 제목에 똑같이 '책'이 들어가는, 같은 작가의 책을 동시에 산 것은 작가에게 느끼는 익숙함 때문이다. 신문사에 입사하고 첫 휴가를 괌으로 떠난 적이 있다. 그의 에세이  <5년 만의 신혼여행>을 수영장 튜브 위에서 킥킥거리며 재미나게 읽었다. 글 속에 회사 선배들이 쓸 법한 특유의 문체나 전개 방식 같은 것들이 곳곳에 숨어 있어서 뭔지 모르게 신기했는데, 알고 보니 같은 회사 선배였다. 물론 내가 입사했을 때 그는 이미 퇴사해 유명 작가로 이름을 날릴 때였다. 평소에도 기자 출신인 김훈 작가처럼 담백하고 드라이한 스타일의 글이 좀 더 친숙하게 와 닿는 편이다. 장강명 작가 책에서도 글쓰기를 배우거나 그의 생각을 읽어내기가 다른 작가들 보다 한결 편하게 느껴진다.



자전거 앞바구니에 책들을 넣고 집으로 오는 길이 한결 가볍다. 다섯 권의 선생님이 잡히지 않던 글쓰기윤곽을 그려준다고 생각하 페달을 밟는 두 다리에 힘이 샘솟는다. 플라시보 효과 덕인지 벌써부터 글쓰기 체력이 한층 올라온 듯한 기분. 다섯 권을 샀으니 적어도 5일이라도 약발이 들기를 바래본다. 훌륭한 선생님들을 모셔온 만큼 당분간은 눈치껏 어설픈 글이라도 꾸준히 써야 할 성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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