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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르바 Apr 16. 2021

바보 같았던 첫 수영 이야기

어설펐던 첫 경험

인생 처음 수영이란 걸 배우기 시작했다. 그것도 아침 수영. 휴대폰을 꼼지락 하다 새벽 2시는 돼야 잠드는 올빼미족 습관을 바꾸고 싶었다. 아침형 인간을 만들어준다는 미라클 모닝 부류의 책만 열 권 넘게 읽었을 정도다. 하지만 책만 읽는다고 인생에서 '미라클'이 일어나는 일은 없었다. 미라클이 그리 쉬웠다면 이미 미라클이 아니었겠지.



그래서 수영장에 등록했다. 월수금 아침 7시 초급반이다. 요즈음은 수영을 시작하기 조차 쉽지 않나 보다. 신규 등록자가 모집 인원보다 많아 추첨을 한단다. 경쟁률 1.5대 1. 홈페이지에서 등록 버튼을 누른 뒤 추첨 결과를 기다렸다. 삼일 뒤 결과가 떴다. 대학 합격 통보 결과를 확인할 때처럼 묘한 긴장이 일어났다. 화면에는 다행히 내 번호가 떠 있었다. 1이 아닌 0.5에 드는 불운이 올까 걱정했는데.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드디어 첫 수업이 있는 지난 금요일. 전날 밤 한 선배의 2차 술 약속을 내팽개치고 조기 귀가를 택했다. 버스를 타러 뛰어가자 뒤에서 "배신자"라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혹여나 늦잠을 자서 첫 수업을 놓치거나 '숙취 수영'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첫 시작의 설렘을 온전히 느끼고 싶었으니까.


몸은 참 신기하다. 이미 30년 간 굳어 버린 기상 시계가 몸에 내장돼 있어서 일까. 알람을 6시 0분, 6시 10분, 6시 20분 3개를 맞춰 놓았는데 잠결에 다 꺼버렸다. 다행히도 첫 수업이라 긴장한 탓인지 6시 45분 저절로 눈이 떠졌다. 7시 수업까지 남은 시간은 15분. 수영장까지는 걸어서 대략 15분 걸리는 거리. 침대에 누워 갈지 말지 망설임의 1분을 보냈다. 남은 시간 14분. '에이씨, 알람 못 들은 것도 운명인데 그냥 더 자고 다음 주부터 갈까...'라는 생각이 우세했다. 하지만 '하, 그래도 첫 수업을 안 가면 계속 안 가지 않을까... 어떻게든 일단 가보자!'라고 다짐했다.


벌떡 침대에서 일어났다. 떡진 머리를 감추려 모자를 꾹 눌러썼다. 수영복을 가방에 넣고 전력 질주를 했다. 수영장 가다가 운동은 벌써 다 한 것 같다. 숨을 헐떡이며 입구에 도착했다. 탈의실로 가 헐레벌떡 수영복으로 갈아입었다. 수영장에 들어선 시간은 정확히 7시. '아마 침대에 계속 누워있기로 했다면 이 상쾌한 기분을 느낄 수 없었겠지.' 수영도 배우기 전부터 "해냈다"는 뿌듯함이 온몸을 채웠다.


수영장에 들어서니 초급/중급/상급이라고 적힌 팻말이 라인별로 놓여 있었다. 나는 초급이 적힌 라인 근처에 멀뚱히 섰다. 박명수의 '바다의 왕자' 노래가 울려 퍼졌다. 수강생들은 노래에 맞춰 팔다리를 휘저으며 몸을 풀기 시작했다. 움직임을 보니 다들 잠에서 덜 깬 눈치였다. 눈치껏 슬쩍 물속으로 들어가 신규 수강생이 아닌 척 율동에 맞춰 몸을 풀었다.




"어디까지 배웠어요?"

노래가 끝나자 강사 선생님이 내게 다가와 물었다.

"오늘 처음이에요."


엄밀히 따지자면 처음 수영을 배운 건 아니었다. 수능을 치고 난 뒤, 그러니까 십 년 전쯤 수영장에 등록한 적이 있었다. 대학생이 돼 바닷가로 엠티를 가 수영할 기대부풀었을 때다. 그런데 나를 뺀 수십 명의 수강생들은 모두 꼬마 아이들이었다. 유아반을 등록한 건 아니었는데 이유는 알 수 없었다. 물론 꼬마 친구들과 같이 배워도 상관은 없었다. 하지만 왠지 모를 부끄러움은 어쩔 수 없었다. 그렇게 하루 만에 수강 취소했다.


이번만큼은 아침형 인간이 돼서, 미라클 모닝을 해내고, '수린이'에서 벗어나 올여름을 즐기는 모습을 상상했다. '첫 시간 뭘 배우려나...' 강사님의 지시를 기다다. 때마침 강사님이 말을 꺼냈다. "회원님, 수영복 바지 거꾸로 입었어요. 갈아입고 오세요."


아뿔싸. 처음은 늘 이런 것인가. 앞뒤가 있는지도 잘 모르고 입었는데 강사님은 귀신 같이 반대로 입은 걸 알아차렸다. 겸연쩍게 "네."라고 대답하고는 다시 허겁지겁 탈의실로 들어가 반대로 입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 같은 표정으로 다시 수영장 안으로 들어갔다.  


초급반에 두 명의 남녀가 먼저 눈에 띄었다. 나처럼 멀뚱멀뚱 어색하게 있는 모습을 보니 첫 수강생이 틀림없었다. 반면에 나머지 일곱 수강생은 눈빛이 달랐다. 자유형을 연습 중인 그들은 같은 초급반인데도 눈에 자신감이 차 있었다. 갓 태어난 아기를 바라보듯 날 쳐다보는 것처럼 느껴졌다. 강사님은 "저기 회원님들도 딱 한 달 전에 회원님들처럼 처음 시작했어요. 여러분도 열심히 하면 저렇게 할 수 있으니까 너무 무서워 마세요."라고 말했다.  


일곱 명의 수강생은 처음 군대에 훈련병으로 들어갈 때를 떠올리게 했다. 식당에 가면 4주 먼저 배치받은 훈련병들을 마주칠 일이 있다. 그들은 늘 우리를 가소롭게 여겼다. 같은 훈련병 신분이면서도. 난 4주 먼저 입소한 훈련병들이 신과 같이 느껴졌는데 지금 자유형을 연습하는 저들도 마찬가지로 보였다. 옆 라인의 중급, 상급반 수강생은 차례대로 상병, 병장처럼 보였고. 




수업의 기대가 컸던 걸까. 물속에 들어가 호흡법 정도는 배울 줄 알았다. 기대와 달리 수영장 라인 위에 엉덩이를 걸터앉은 뒤 다리를 쭉 펴고 발목을 세웠다 폈다 하는 연습을 했다. 강사님은 내가 하는 걸 보더니 "10년 넘게 가르치면서 회원님처럼 발목이 쭉 안 펴지는 회원은 처음 봐요. 연습 제대로 안 해서 계속 안 펴지면 1년 내내 물장구만 연습해야 할지도 몰라요."


50분간 발목을 구부렸다 폈다를 반복하니 금세 수업이 끝났다. 마지막 인사로 강사님은 당부의 말을 했다. "같이 시작하는 수강생들끼리 분위기가 진짜 중요해요. 달 앞선 수강생들은 서로 경쟁도 하면서 실력이 부쩍 늘었거든요. 절대 수업 빠지면 안 돼요."  저 말을 들으니 영장이 아닌 대치동 학원가 온 기분이 들었다.


수업을 마치고 탈의실로 들어갔다.  씻고 나오는데 구비된 수건이 보이지 않았다. 그제야 떠올랐다. <준비물: 수건이 구비돼 잇지 않으니, 챙겨 오시기 바랍니다.> 쭈뼛쭈 서 있는데 옆에 휴지가 보였다. 대충 휴지로 온몸을 쓱 닦았다. 몸에 물기가 반쯤 남은 것 같았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옷을 입고 수영장을 나왔다. 입구 카운터에 가서 "수건 안 주는 거 맞죠?"라고 확인차 물었다. 그러자 직원은 "없으면 강사님께 달라하면 수건 주긴 하는데... 아이고 어떻게 하셨어요?"라고 되물었다. 나는 휴지로 닦았다고 하긴 민망해 "아, 네"라고 짧게 대답하고는 수영장을 후다닥 빠져나왔다.





첫 경험이란 늘 이런 걸까? 수영을 마치고 출근하며 '현타'가 왔다. 다섯 살 꼬마 같이 어설펐던 내가 무척 부끄러웠다. 알람을 못 들어 가까스로 수영장에 도착해 바지를 반대로 입고 이등병처럼 눈치만 보다 발목을 못 편다고 혼나고 수건이 없어 휴지로 온몸을 닦은 모습들 말이다.


나 이렇게 어설픈 사람이었나 싶었다. 잊고 있던 지난 첫 경험들이 주마등처럼 떠오르게 시작했다. 처음 서울로 올라와 지하철을 탈 줄 몰라 헤맬 때, 운전병으로 군대에 가 처음 수동 차량을 몰다 시동을 계속 꺼버려 부대에서 쫓겨날 뻔한 일, 처음 헬스장에 갔다가 기구 사용법을 몰라 몸짱 형님들 눈치만 보다 집으로 온 기억, 처음 기자가 되고 수습 기간 무작정 경찰서로 가 문전박대당한 날, 첫사랑에게 사랑을 표현하는 법을 몰라 안절부절못하던 모습 같은 것들.


세월이 흘러 웬만한 서울 지하철 노선도를 외워 눈감고 다닐 정도가 됐고, 주변 사람들이 헬스 고민이 있으면 나한테 조언을 구하기까지 하고, 어느덧 취재원들과 농담을 주고받으며 일하는 6년 차 기자가 됐으며, 2년 간 운전만 했더니 운전을 즐기는 베스트 드라이버가 됐고, 어찌할 줄 몰라 안절부절못하던 마음은 어느새 뜨거운 사랑으로 바뀌어 있었다. 흐르는 시간 속에 수많은 어설픈 첫 경험들을 자연스레 잊고 살아왔던 것뿐, 첫 경험이 없는 현재는 존재하지 않았다.


지난 첫 경험들이 하나둘 떠오르자 오늘 수영장의 '어설픔'이 왠지 반갑게 느껴졌다. 사실 요즈음 일상을 떠올려 보면 어설플만한 일들은 많지 않다. 어설픔은 용납하기 어려운 일이 됐으니까. 무슨 일이든 어설퍼선 안 되는 나이가 됐다고 정의 내려서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막상 오랜만에 어설픈 첫 경험을 해보니, 처음부터 모든 게 완벽하게만 돌아간다고 해서 꼭 좋은 일일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어설프고 부끄러운 이 경험들이 없었다면, 평온하고 완숙해진 지금의 일상들도 존재할 수 없었던 것 아닐까. 오늘 실수들 덕분에 앞으로는 휴대폰 알람 개수를 더 많이 맞출 것이고, 다시는 바지를 거꾸로 입지 않을 것이며, 발목은 신경 써서 핀 채 연습하며, 수건을 꼭 챙기고 수영장으로 가게 될 테니까.


1년, 2년이 흘러 평형과 접영을 배우며 고급반 라인에 서 있는 내 모습을 상상해본다. 초급반에 새로 들어온 수강생들을 볼 때가 오면 오늘의 첫 경험이 떠오르지 않을까. '나도 저럴 때가 있었지' 하면서 혼자 피식 웃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아마 나처럼 바지를 거꾸로 입고 물 안으로 뛰어드는 수강생이 있었는지도 유심히 지켜볼 생각이다. 바보 같았던 나의 첫 수영은 매우 매우 어설펐기에 매우 매우 성공적이다.  



수영장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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