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4일 하루의 휴가가 생겼다. 제주 항공권을 검색했다. 왕복 2만6000원. 가격이 떠나게 만드는구나. 4일 아침 출발해 5일 아침 다시 비행기로 도착하자마자 회사로출근하는 일정. 째깍째각. 딱 24시간 여행이다. 행복에 관한 책 한 권을 달랑 챙겼다. 여행 계획은 없어도, 근사한 테마는있다.
<무계획 24시간 제주 여행 - 행복을 찾아서>
제주공항에 내렸다. 어느덧 열 번쯤은온 제주. 스무 살 이후 일 년에 한 번씩은 찾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어쩐지 이젠 야자수 나무도 익숙한 풍경이다.
제주 공항에 내려서 보이는 첫 풍경
늘 렌트를 했다. 근데 하필 전날 밤지갑을 잃어버렸다. 운전면허증이 사라져 뚜벅이가 됐다. 공항 출국장을 나오자 때마침 버스 한 대가 도착했다. 151번 버스였다. 목적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몸을 싣는다. 버스가 출발하고 난 뒤 종점을 찾아봤다. 정처 없이 탄 버스의 최종 목적지는? 대한민국의 최남단 마라도로 가는 운진항. 이것이 바로 계획 없는 여행의 색다른 묘미가 아닐까.
버스는 수박을 반으로 가르듯 제주를 관통했다. 한 시간 반이 흘러 마라도로 가는 운진항에 도착했다. 배가 너무 고팠다. 마라도의 명소인 짜장면 집에서 곱빼기를 시켜먹기로 다짐했다. 티켓을 구매하러 매표소로 들어갔다.
"마라도 한 장이요."
"오늘 배편 이제 없어요."
직원의 말투는 차갑고 건조했다. 표정은 일말의 흐트러짐이 없었다. 혹시라도 날씨가 갠다면...이라는 가정은 애초에 꺼내지도 말라는 듯이...
제주공항에 도착할 때만 해도 멀쩡하던 날씨였다. 한라산을 지날 무렵부터 빗줄기가 거세진 게 화근이었다. 결항이란다. 남은 여행 시간은 단 20시간. 망했구나 망했어.
빗줄기에 바람까지 휘몰아치더니 우산이 뒤집혔다. 시작부터 운이 참 없다. 그냥 집에서 띵가띵가 좀 쉴 걸. 표가 좀 싸다고 무작정 떠나다니. 계획 없는 여행은 예상치 못한 짜릿함을 선사하지만 반대로 예상치 못한 좌절감을 안겨주기도 한다.
절망의 끝에서 한줄기 희망을 찾는 게 행복일까. 다른 건 몰라도 여행지에 책 한 권은 꼭 챙겨 다니는 나 아닌가. 책이 좋다. 근처 서점을 검색했다. 운 좋게도 도보 10분 거리에 독립서점 <이듬해 봄>이 나왔다. 비바람을 뚫고 서점으로 돌진했다.
서점은 우리 시골 할머니 집처럼 구석진 곳에 숨어 있었다. 대문으로 들어섰다. 누군가가 서점 바닥에 돗자리를 펼쳐놓고 쉬고 있었다.
시골 할머니 집 같았던 <이듬해 봄> 독립서점 입구에서
"영업... 하시는 거죠?"
"네, 네 둘러보시면 돼요"
만약 두 번 연속 허탕을 쳤다면? 어쩌면 누구보다 지독한 계획 주의자로 변절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대화 상대가 필요했었나. 사장님께 짧은 제주 여행기를 구구절절 풀어놨다. 행복에 관한 책 한 권 들고 아무 계획도 없이 하루 여행을 하러 제주를 찾았다가 마라도 배편이 끊겨 비만 쫄딱 맞고 후회하는데 우연찮게 맘에 쏙 드는 서점을 찾아 참 다행이라고.
사장님이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아직까지는 나의 짧은 여행에 관심이 있으신지 조용히 쉬고 싶으신지 판단이 잘 서지 않았다.
이듬해 봄 내부
"커피 한 잔 드실래요?"
사장님이 물었다. 안 그래도 아침 일찍 비행기를 타느라 카페인 섭취를 못했다. 금단 증상인지 안절부절못하고 있던 참이었다.
"아, 커피요?"내가 잠시 뜸을 들였다. 그러자 사장님은 태연하게 "다들 처음에는 돈 달라고 하는 거 아니냐고 당황하더라고요. 돈 받고 그런 거 아니니까 걱정 마세요" 라며 웃어 보였다.
속마음을 들킨 것처럼 겸연쩍게 "주신다면 감사히 마시겠습니다"라고 했다. 사장님의 내려준 따뜻한 드립 커피를 한 모금 삼켰다. 육지에서 마시던 자본의 쓴 맛이라기보다는 순수한 정이 담긴 제주의 맛이었다. 그제야 비로소 제주에 왔구나 실감이 났다. 그전까지는 몸은 제주에 왔어도 마음은 여전히 육지의 속박에서 벗어나지 못했었나 보다.
커피 한 잔에 대화가 물꼬를 텄다. 하루 여행으로 행복을 찾으러 제주를 찾았다고 했다. 그러면서 행복에 관한 책 <굿 라이프>를 자랑스레 꺼내보였다. 그의 행복이 궁금해졌다. 뜬금없는 이상한(?) 손님의 행복론이 먹혀든 걸까. 자연스레 사장님도 본인의 이야기, 그러니까 행복의 비밀을 조금씩 풀어냈다.
'굿 라이프' 책과 사장님이 주신 커피
사장님은 십 년 전 육지에서 제주로 이사를 왔다. 잘 나간다는 SK하이닉스를 그만두고 말이다. 누구보다 일에 미쳐있던 시절이었다. 그러다 뜻밖의 일을 겪었다. 남편이 뜻밖의 큰 교통사고를 당했다. 그때 결심했다. '오늘 이 순간을 정말 행복하게 살아야 하는구나.' 그전만 해도 본인은 이천에서, 남편은 일산에서, 애기는 강릉에서 언니가 봐주며 각자 떨어져 지냈다. 그러다 제주에 온 뒤 처음으로 셋이 함께 살게 됐다. 애기 나이가 세 살 때였다. 함께하고 나서 깨달았다. 함께일 때 비로소 더 행복하다는 것을.
십 년 간 제주에서 '롱런'한 비결이 궁금해졌다. 사장님은 "제주에 대한 기대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알려줬다.
"보통 서울에서 제주로 이사 온 사람들 열 명 중에 절반은 넘게 2~3년도 안 돼 다시 서울로 돌아가요. 대부분 제주에 대한 환상을 하나씩 가지고 와서 그래요. 제주에 가면 뭔가 특별할 거라 생각하고 말이죠. 뭔가 정답을 찾아가려 하죠. 그런데 결국 여기도 사람 사는 데인 건 똑같거든요."
그녀가 비 오는 창가를 바라보며 계속 말을 이어갔다.
"제가 어릴 적 강릉 바다를 보며 자라서 그런지 제주에 대해 별 감흥이 없었어요. 그래서일까요. 큰 기대 없이, 사람 사는 곳이 다 똑같지 뭐, 이렇게 생각하니 매일매일이 좋아요. 매일 색다른 제주 바다는 볼 때마다 이뻐 보여요."
특별할 거란 기대와 환상을 버리고, 순간에 집중하는 것. 사장님의 이야기를 듣자 행복의 힌트 하나를 찾은 것 같았다.
밖을 바라보는 사장님 모습
사장님은 또 다른 행복의 힌트 하나를 넌지시 건넸다. 제주에 내려온 초기 서울에서 온 다른 엄마들과 모여 이야기를 할 때마다 이런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차 한 잔 하며 1시간 대화하면 50분은 예전 서울에서 살던 이야기예요. 지금 살고 있는 제주 이야기는 쏙 빠져 있어요. 제주가 서울보다 불편하다는 이야기는 있죠. 그럴 때면 왜 이들은 제주로 내려왔을까 물음표가 들곤 했어요."
물론 사장님도 가끔 서울의 '치열함'이 그리울 때가 있다고 했다. SK하이닉스를 다닐 때 '소속감'이 아쉬울 때도 있다. 처음엔 '트렌드'에서 떨어질까 봐 불안해 평소엔 보지도 않던 패션 잡지를 챙겨보기도 했단다.
하지만 사장님은 제주 생활을 불평하기보다 제주에서의 삶을 하나씩 만들어 가기로 했다. 엄마들과 함께 머리를 맞댔다. 서울보다 교육 여건이 열악하다면, 제주에 사는 여러 작가들을 초청해 동시 쓰기 프로그램을, 제주문화예술재단을 통해 영상 편집을 배우는 체험 활동을 손수 기획했다. 그러면서 엄마들과의 대화에는 점점 서울보다 제주가 등장하는 빈도가 늘어났다.
사장님은 제주로 이사 온 사람들의 공통된 특징을 하나 더 알려줬다.
"보통 제주로 이사 오면 '몇 년 살 거예요?'라는 질문이 꼬리표처럼 따라붙어요. 그러면 보통은 몇 년 있다 다시 서울로 갈 계획이라고 해요. 근데 서울에서 인천으로 이사 가면 이사 왔구나 하지, 몇 년 살 거냐는 질문을 보통 안 하잖아요. 전 제주의 삶을 '시한부 거주'로 하고 싶지 않았어요. 몇 년 있으면 떠나는 공간이 되기보다 제 삶의 터전이 됐으면 한 거죠. 몇 년 뒤 돌아간다는 마음을 지우고 하루하루 살자 마음먹으니 어느덧 10년이 됐네요."
나 역시 지난해 서울에서 세종으로 파견근무를 온 처지였다. 세종에서 만나는 공무원들이나 동료들과 식사 자리의 팔 할은 서울 이야기다. 세종에 머물면서도 세종 이야기는 쏙 빠진다. 언제 서울로 다시 올라가게 될 것이며, 올라가게 된다면 그때 하고싶던 무언가를 할 거라는 식이다. 세종에서의 시간은 서울에 올라가기 전까지 시한부 생활에 머무르고 만다. 결국 행복을 '서울에 가면'이라는 훗날로 미뤄두고 지금의 삶을 놓쳐버리는 건 아닐까. 사장님의 제주가 제주 그 자체로 빛나듯, 나의 세종의 삶이 세종으로서 빛났으면 한다.
선물해드린 '굿 라이프' 책을 든 사장님
슬슬 서점을 떠날 시간이 됐다. 마지막으로 사장님께 물었다. 조금은 단도직입적으로.
"사장님, 그래서 지금 행복하신가요?"
사장님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정적이 흘렀다. 깊은 생각에 잠긴 듯 보였다. "방금 그 질문을 받으니 가슴이 철렁거렸어요." 한동안 생각지 못 했던, 잊고 지내던 주제였기 때문이라 했다. 오랜만에 행복이란 걸 생각해보게 돼 고맙다고 했다.
"서울에서는 늘 '날이 서 있다'는 말을 많이 들었어요. 근데 제주에 살고부터는 '편안해 보인다', '좋아 보인다'는 말을 많이 들어요. 스스로 느끼기에도 좋은 의미로 '내려놓았다'고나 할까요. 움켜쥐고 있으면 어느 순간 손에서 와르르 빠져나갈 수 있다는 불안이 늘 있잖아요. 나만의 속도로, 나만의 방식으로 살다 보니 초창기에 '뒤쳐진다'라고 느낀 불안들이 사라졌어요. 이젠 제주가 진짜 집처럼 느껴져요. 그래서 지금 여기의 삶이 편안하고 행복합니다."
서점을 정말 떠날 시간이다. 아쉬움을 표하자 사장님이 위로의 말을 건넸다.
"저처럼 아예 제주로 이사 오는 것도 방법이죠. 하지만 제주를 여행지로 남겨두는 것도 참 좋을 거 같아요. 서울에서의 치열함이 있기에, 돌아갈 곳이 있기에 제주에서 여행이 행복할 수 있는 거 아닐까요?"
사장님께 들고 온 행복에 관한 책, '굿 라이프'를 선물하기로 했다. 책에서 행복의 실마리를 찾고자 했다. 하지만 이미 목적 달성이다. 사장님에게 충분한 행복의 힌트를 얻었으니까.
계획하지 않은 여행은 그야말로 우연의 연속이었다. 의도치 않게 운전면허증을 잃어버려 아무 버스를 탔고, 때마침 그 버스는 마라도로 가는 항구로 향했으며, 마라도의 배편이 끊겨, 근처 독립서점에 들렀고, 사장님과 행복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으며, 서점에서 우연히 만난 두 분 덕분에 함덕 해변까지 '히치 하이킹'을 했고, 또 다른 서점에서 만난 두 분에게선 '퇴사 후 제주 한달살이' 이야기를 들었고, 미국에 살며 먹던 타코를 함덕 해변으로 가져와 전날 오픈한 사장님의 기대에 부푼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다.모든 것은 계획에 없었다. 하지만 모든 만남은 하나하나가 연결됐다. 단 하루의 여행이 기나긴 추억으로 엮어졌다.
미국에서 살며 먹던 타코를 가져와 전날 가게를 오픈한 '롤 타이드' 사장님
계획 없는 여행을 또 떠날 생각이 있냐고? 그렇다. 나는 늘 뜻대로 되지 않을 때, 의도대로 되지 않을 때 새로운 것을 배우곤 한다. 일상의 테두리에서 벗어날 때 굳게 박혀 있던 편견이 자연스럽게 빠진다.물론 계획을 세운 여행이 훨씬 좋은 추억을 만들어 줄 때가 있다. 반대로 계획 있는 여행이라고 최악의 여행이 되지 말라는 법도 없다.
저녁쯤 <이듬해 봄> 사장님께서 나 몰래 찍어주신 사진들을 메시지로 보내주셨다. 그는 "오늘 행복에 관한 이야기를 한 뒤 남편과 일상의 행복과 감사함을 되뇌자고 말했어요"라고 했다. 그러면서 꼭 다시 서점에 찾아오라고 했다. 대신 조건 하나를 달았다. 그땐 사랑하는 그녀와 함께 오라며.
나는 꼭 그러겠다고 약속했다. 다음 제주여행에는 <이듬해 봄> 방문 일정을 스케줄에 정확히 적어둘 것이다. 그땐 계획이 잘 짜인 여행이 되려는 모양이다. 물론 사랑하는 그녀와 함께일지는 전혀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이듬해 봄'쯤에는 가능하지 않으려나?